심리학 연구서나 관련 에세이를 읽으면 감정에 눈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러한 기록들을 비판하는 사회학 연구서나 비평집을 읽으면 자연스레 사회에 방점이 찍힌다. 한데 초점을 바꿔보자. 자기계발류의 영향 때문인지 간혹 사람들은 심리학이 사회보다는 개인에만 치중한다고 오해한다. 허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이 보는 심리학 도서엔 심심찮게 사회가 이야기되고 있다.
서점에 가면 오늘도 다양한 나라의 심리 전문가나 방송인, 작가들이 사회를 논한 책들이 보인다. 나는 일본인이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이다. 일본의 심리학 에세이엔 내가 종종 ‘사소주의’라 부르는 사고가 스며들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사소주의란 다른 나라에선 한 장의 김을 네 등분할 것을 일본에선 여덟 조각을 내어 먹을 것 같다는 식의 자잘한 마음 상태다. 읽다 보면 무얼 이런 일까지 털어놓나 싶다. 일본인들이 그려내는 사회에 뭉툭함이란 없다. 이들은 이제 그저 미시적이어선 안 된다며,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선 ‘초-미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논한다. 그리곤 자신이 몸소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사소주의자들은 자신의 일상을 세분화하는 데 익숙하다. 시간대별로 삶을 세세히 조각 내어 이야기한다는 게 아니다. 사소주의자들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거나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혹은 인상 깊은 호감을 준 사람에게 받은 감정을 알알이 들춰내는 기술을 지녔다. 이런 기술은 ‘센스’로 요약된다. 사소주의자들은 묻는다. 당신은 이 사회를 살아가기에 충분한 센스를 지녔습니까? 센스는 감각으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오래 전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는 ‘감득력(感得力)’이라 정의한 적이 있다. 즉,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깨닫는 힘이 센스다.
이런 정의에 치우쳐 사회를 그려내는 사소주의자에게 문제가 없진 않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데 신경 쓰다 보니 그만큼 되돌아온 상처에 예민한 그들은, 사회를 호감과 불편으로 나누어 진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진단은 개인의 센스를 하나하나 따져서 ‘측정’하는 과정이다. 숫자가 나타나진 않지만, 사소주의자가 묘사하는 체험담은 수치라는 은유가 스며들어 있다.
가령 사소주의자의 선두격인 만화가 마스다 미리는 ‘뭉클하면 안 되나요’에서 “조심하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여러 상황을 세심히 설명하고 은근히 감동을 준 사람을 지목한다. 이는 본인에게 뭉클함을 준 상대의 센스를 채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개그맨 와카바야시 마사야스는 ‘사회인대학교 낯가림 학과 졸업하기’에서 상대의 응대를 예민하게 측정하면서 자신의 소심함과 유별남을 도드라지게 선보인다. 그에게 사회인이란 타인의 반응을 간파해 어떻게 하면 그 혹은 그녀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지 나만의 안전이 확보된 규칙과 자리를 잘 찾는 사람일 뿐이다.
센스 좋은 사람을 나무라는 것도,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을 타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데 해박한 이들이 그리는 사회를 접하다 보면 문득 궁금하다. 과연 그들에게 사회란 무엇일까. 나는 최근 사소주의로 대변되는 심리적 경향 속에는 사회보단 ‘사이’에 대한 집착이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 나와 당신의 접촉에 신경 쓰는 관계로 축소될 때, 사회는 줄곧 내가 누군가와는 말려들지 않아야겠다, 엮이지 말아야겠다는 ‘조심성’으로 정의될 뿐이다. 조심성에 집착하면 타인은 늘 ‘정밀도’의 울타리에 갇힌다. 개인에게 정밀함을 묻는 것은 곧 얼마나 긴장하며 사는지 따지는 일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센스가 소소하고 내밀한 감동의 기술이었던 시대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지 모른다. 센스는 당신이 늘 팽팽한 고무줄 같은 긴장감을 갖길 강하게 권장하는 평가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비단 일본 사회의 논의로 치부하기엔 그 감정의 거리가 멀어 보이진 않는다.
김신식 감정사회학도ㆍ‘말과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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