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치닫는 암… 촌각 다투며 따낸 동성혼 합법화
2014년 미국의 어느 동성커플
보수적 인디애나 주는 효력 부정
절절한 가족 사랑에 여론 뜨거워
법원 불과 일주일 만에 혼인 인정
지금까지 합법화 38개 주로 늘어
난소암을 앓던 니키 콰스니는 2014년 3월 운전 중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을 느꼈다. 곧장 응급실로 와야 한다며 의사가 경고했던 바로 그 증상이었다. 하지만 콰스니는 통증을 견디며 혼자 40여 분을 더 달려 인디애나 주 경계를 넘어 일리노이 주 병원을 찾아갔다. 지난 해 8월 AP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를 두렵게 한 것은 병과 죽음보다 법과 제도의 억압이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인디애나 주법에 따르면 13년 반려자 에이미 샌들러도 완벽한 타인일 뿐이어서, 가족에게만 면회가 허용되는 막바지 투병 과정이 더 고독하고 절망적이리라 그는 두려워했다.
다행히 퇴원한 그는 곧장 인디애나 주 연방지방법원에 자신들을 법적 부부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사망진단서에 샌들러가 아내로 기록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사망 후 유산과 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였다. 콰스니와 샌들러는 2011년 일리노이 주에서 시민결합(Civil Union) 지위를 얻었고 13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결혼도 했지만, 인디애나 주는 다른 주의 동성혼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지방법원은 4월 주 정부가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이었다. 그리고 6월 동성혼을 허용해 달라는 나머지 소송 건에 대해서도 주 정부가 승인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주 정부는 즉각 항소했지만 항소법원과 대법원은 지방법원의 판결을 편들었다. 인디애나 주는 10월부터 동성 커플의 혼인 확인서 발급을 시작했다. 소송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사랑과 호소로 연방 법원을 감동시키며, 미국의 모든 주를 통틀어 법정 투쟁 최단 기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를 이끈 니키 콰스니가 2월 5일 별세했다. 향년 38세.
니키 콰스니(Nick Quasney)는 인디애나 주 이스트 시카고에서 태어나 먼스터에서 자랐다. 94년 먼스터 고교를 졸업했고, 퍼듀대와 미주리주립대에서 아동학과 체육학을 전공했다. 그는 체육교사였고, 스포츠광이었다. 특히 육상과 사이클링을 즐겨, 암 발병 후에도 수 차례 트라이애슬론 대회에 출전할 정도였다.(nwi.com, 2015.2.8)
동갑내기인 콰스니와 샌들러는 2000년 만나 줄곧 함께 생활했다. 둘은 여느 동성애자 커플들처럼 세인의 시선과 차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국의 대도시들, 세인트루이스 라스베이거스 시카고 등을 두루 돌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딱히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안정적으로 충만했던 둘의 일상은 2009년 콰스니의 암 발병과 함께 급변한다. 그 해 시민결합 커플(동성혼을 인정하는 대신 부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제도. 파트너의 사망시 연금 혜택 등 일부 법률상 배우자와 동등한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법적 보호의 범위가 혼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다)로 등록한 것도, 한 살짜리 세 살짜리 두 딸을 입양한 것도, 서로를 붙들고 싶고 서로에게 묶이고 싶고, 그럼으로써 불안하게 덜컹거리다 언제 벼랑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시간을 함께 견디기 위해서였다. 콰스니가 나고 자랐고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먼스터로 이사를 결심한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콰스니 일가는 2011년 귀향한다.
샌들러는 2014년 8월 시카고트리뷴 인터뷰에서 “다른 곳에서 우리는 100% 부부로 대접받았지만 인디애나에서는 완전히 법적 타인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았던 장애물들에 계속 부딪쳐야 했다”고 말했다. 헬스클럽에서 가족 멤버십 카드를 발급 받을 수도 없었고, 딸을 병원에 데려가서 혈액검사를 받을 때에도 병원 직원은 콰스니의 면전에서 ‘콰스니(아버지)씨가 누구냐’고 묻곤 했고, 시카고에서 교사로 일하던 때처럼 가족 건강 프로그램도 인정 받을 수 없었다. 매사추세츠 주가 발급한 혼인 확인서도 주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인디애나의 동성혼도 합법화 되겠지, 하며 기다려볼 참이었다고 콰스니는 말했다. 수 차례의 수술과 방사선치료 등 당장의 투병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병세는 세상의 더딘 변화보다 훨씬 가파르게 악화했다.
2014년 4월 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내면서 콰스니는 말기(4기) 난소암 진단서를 첨부했다. 그는 하루 빨리 법이 인정한 부부로 살고 싶었지만 지금껏 참고 기다려 왔다고, 하지만 이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신의 사망진단서에라도 기혼자로 기록되어 파트너에게 자신의 사망에 따른 혜택을 남겨주고 싶다고 썼다. 법정에서 콰스니는 “나는 내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다른 이들처럼 결혼한 부부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고, 또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의 고향에서 에이미와 우리 딸들과 함께 합법적인 가족으로 인정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콰스니 커플의 법정 투쟁은 ‘What Makes A Family’라는 제목의 TV영화(2001년, 브룩 쉴즈 주연)로 잘 알려진 80년대 플로리다의 레즈비언 커플 재닌 래트클리프(Janine Ratcliffe)와 조앤 펄먼(Joan Pearlman)의 사연을 환기시키며, 여론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조앤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은 뒤 병으로 숨지면서 재닌과 조앤 부모가 아이의 양육권을 두고 긴 소송을 벌였고, 곡절 끝에 재닌이 승소한 실화다.
인디애나 주 연방지방법원 리처드 L. 영 판사는 소장이 접수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콰스니 커플의 청을 수락, 매사추세츠 주가 발급한 혼인확인서가 인디애나 주에서도 유효하다고 판결한다.
그렇게 둘은 인디애나 주 최초의 동성 부부가 됐다. “엄청난 행운이죠. 내 파트너에게뿐 아니라 인디애나 주 모든 시민에게 내가 결혼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잖아요. 하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어요. 우린 결혼할 권리를 가진 수많은 인디애나의 동성 커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요.”콰스니는 “하지만 이게 내가 말기 암 환자이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이라는 느낌을 갖는 건 싫어요. 그건 옳지 않은 일이죠”라고 말했다.
콰스니-샌들러 부부의 탄생으로 인디애나주의 동성혼 합법화 투쟁은 더 뜨겁게 달아 올랐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14년 6월 영 판사는 동성혼 불허는 연방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100여 건의 동성혼 신청 소송 사례를 일거에 주 정부로 보내 즉각 혼인 확인서를 발급하도록 판결한다. 판결에서 영 판사는 “조만간 미국 시민은 원고들과 같은 커플의 결혼을 흔히 보게 될 것이며, 그걸 ‘동성혼’이 아니라 그냥 ‘결혼’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젠더와 성지향을 빼면 그들은 거리의 여느 부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다르지 않은 그들을 다르지 않게 대하라는 게 미합중국 헌법의 요구다”라고 밝혔다. 물론 주 정부는 ‘시기상조’라며 항소한다.
9월 말 연방대법원은, 인디애나와 오클라호마 유타 버지니아 위스콘신 등 5개주 항소법원을 거쳐온 동성혼 합법화 상고에 대해 ‘심리하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무대응의 대응(act by inacting)’ 즉 동성혼 금지를 위헌이라 판결한 하급법원의 결정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항소심의 판결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거였다. 2013년 6월 결혼을 이성간의 결합으로 제한한 ‘결혼보호법(DOMA)’을 위헌 판결한 바 있는 대법원이었지만 여론을 앞질러 미 전역의 동성혼 합법화를 자극할 수 있는 판결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5개 주는 즉각 동성혼 증명서 발급을 시작했다.
동성애자 법 인권 운동의 거점 가운데 한 곳으로, 콰스니 소송을 대리했던 람다 법률사무소 폴 카스틸로 변호사는 “니키와 에이미의 용기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동성결혼은 2003년 매사추세츠 주가 처음 합법화한 이래 지난 2월 앨라배마 주까지 가세, 현재 38개 주에서 합법화됐다.
콰스니는 펄 잼의 노래를 좋아했고, 특히 그의 ‘Light Years(긴 세월)’를 즐겨 듣고 불렀다고 한다. “낭비할 시간도 여투어 둘 시간도 없지. 몽땅 다 써야 해(No time to be void or save up on life, you gotta spend it all)”라는 노래의 몇 소절 가사가 그에게는 더 특별했을 것이다.
영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중심에 서다
동성애자 신문으로 위험 알려
AIDS 정보 전무했던 80년대
의사들이 정부 정보보다 신뢰
영국 게이 인권운동의 역사를 개척한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1980년대 런던 거점의 동성애자 무료 신문 ‘Capital Gay’를 창간한 마이클 메이슨(Michael Mason)이 2월 1일 숨졌다. 향년 67세.
그는 동성애가 법으로 금지됐던 1947년 3월 5일 영국에서 났다. 옥스퍼대 에드먼드홀에서 법학 학위를 딴 한 그는 IBM에 취업해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1970년대 게이해방전선(Gay Liberation Front)에 투신한다. 1969년 미국 뉴욕의 스톤월 항쟁 직후 출범한 GLF는 선구적인 동성애자 권익단체로 영국 지부는 70년 런던 정경대에서 첫 회동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지도 노선의 이견으로 GLF가 74년 와해된 뒤 메이슨은 72년 창간한 격주간지 ‘Gay News’에 가담, 6개월 뒤 주간이 된다. ‘게이 뉴스’는 70년대 영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중심 축 가운데 하나였다.
메이슨은 81년 친구 그레이엄 맥크로우와 함께 런던의 동성애자 커뮤니티 소식과 이슈를 선도하던 주간지 ‘Capital Gay’를 창간한다. 초기 배급망이 없어 자신들의 밴으로 클럽과 술집 호텔 등을 돌며 직접 신문을 배포한 이야기는 유명한데, 한창 때는 발행부수가 2만 부에 달했다. ‘캐피털 게이’는 사설을 싣는 신문으로는 영국 최초의 무료 신문이었다.
캐피털 게이는 1982년 줄리앙 멜드럼이 칼럼에서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란 말을 맨 처음 사용한 것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소개돼 있다. HIV는 이후 과학 저널 ‘네이처’등이 따라 쓰면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됐다.
캐피털 게이는 AIDS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거의 전무하던 80년대 초부터 보건당국보다 앞서 관련 정보와 소식을 전하며 예방을 당부, 의사들조차 캐피털 게이의 뉴스와 칼럼을 읽고 정보를 얻곤 했다고 텔레그래프는 소개했다.(2015.2.9) 텔레그래프는 영국의 게이들이 미국에 비해 AIDS 피해를 덜 입게 하는 데 메이슨의 캐피털 게이가 큰 기여를 했다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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