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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규재라는 언론인

입력
2017.02.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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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 정지된 박근혜 대통령의 정규재TV와의 인터뷰는 하루 저녁 술렁임으로 지나갔지만, 늦게나마 짚을 게 있다. 박 대통령의 답변이 얼마나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자가당착이었는지가 아니라, 사실 여부를 묻지 않은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이 언론의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다.

연초에도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대통령이 부른다고 달려가 변명만 보도했어야 했느냐는 비판이 나왔지만 간담회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제안에 찬성하지 않는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박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겠다. 나라를 뒤흔든 엄청난 파장의 복판에 있는 당사자를 직접 만나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 주필이 인터뷰를 하기로 한 것은 일면 용기 있는 결정이다.

그러나 ‘진짜 질문’을 던질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정 주필은 “(인터뷰 당일인 1월 25일) 오전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헌법재판소에서 폭로했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유 전 장관에게 정유라씨가 출전한 승마대회를 감사한 국ㆍ과장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찍어 인사조치하라 한 게 사실이냐”고, 폭로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정 주필은 “청와대에서 굿을 하거나 향정신성 의약품에 중독됐다는 소문도 있다”고 물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후 7시간 동안 도대체 뭘 하느라 대면보고도 받지 않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나와 ‘학생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었다던데’라는 엉뚱한 질문을 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검찰도 “정말 궁금하다”며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에게 대통령 행적을 물었다는데, 정 주필은 진정 궁금하지 않은지 나는 그게 궁금하다. “블랙리스트가 있었냐”는 질문에 박 대통령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는데, “그러면 유 전 장관이 대통령에게 ‘블랙리스트 차별을 멈춰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이야기는 뭐냐”는 추가 질문도 없었다. “최순실씨의 사익 추구나 국정개입은 몰랐다”는 박 대통령에게 왜 현대차에 최씨의 광고대행사 플레이그라운드 팸플릿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는지, 왜 민간 기업인 KT에 광고업무 담당 임원을 채용토록 압박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정 주필은 박 대통령에게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지만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질문항목에 거의 없었다. 인터뷰의 주된 질문거리는 소문과 의혹, 박 대통령의 느낌과 생각이었는데, 국민들은 진실이 알고 싶을 뿐이다. 루머는 진실이 명백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지, 루머 때문에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자의 성향이 보수적일 수도 있고 박 대통령 지지자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신념과 사실을 혼동하지 않는 일이다. ‘자연인 정규재’라면 대통령을 만나 “촛불의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해도 상관 없지만, ‘언론인 정규재’는 “내 관심사안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중요한 질문을 피해선 안 된다. 보수든 진보든 팩트에 천착하는 기자다운 기자를 나는 여럿 알고 있다. 무례하고 오만하다고 욕 먹기가 일쑤인 기자들은 어떤 권력 앞에서도 겁도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런 비판을 사소하게 만든다.

어쩌면 정 주필은 진짜 질문을 던질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니라 신념으로 사실을 덮어버리는 과용을 부린 것이다. 미디어오늘에 그는 “박 대통령 사건의 본질은 근거 없는 루머”라고 했고,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처음부터 재판과 관련한 사안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만약 검찰과 특검이 밝혀낸 혐의가 불법행위가 아닌 통치행위여서 탄핵 사유도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박 대통령에게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정 주필은 솔직하게 칼럼으로 주장을 쓰는 게 좋았겠다. 인터뷰이가 원하는 대로만 써야 하는 인터뷰라면 굳이 일간지 주필께서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김희원 기획취재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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