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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물먹는하마쯤 안 사주는 수고

입력
2016.05.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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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사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옥시 영국 본사 관계자 8명을 형사고발하는 기자회견 중 피해자 윤정애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사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옥시 영국 본사 관계자 8명을 형사고발하는 기자회견 중 피해자 윤정애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설마 소비자를 죽이려고 독극물을 판매하는 회사가 있겠느냐고, 고의성을 입증할 수 없어 살인죄 적용은 어렵다고 검찰이 밝혔을 때 우리의 상식은 ‘아무렴,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무참하게 배신당하니 문제다. 의도는 없었을지언정 독극물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제품이 버젓이 진열되고 판매되었다. 위생관념이 철저한 사람일수록 피해를 입었다. 그것도 약자인 영ㆍ유아, 임부, 산모에게 집중됐다. 가습기 살균제가 유발한 이 엄청난 참상은 구체적으로 알면 알수록,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처럼 왜 나부터 진작 뭔가를 하지 못했을까 하는 미안함이 깊어진다.

돈벌이가 되는 짐은 한도를 초과해 싣고, 선박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는 그만큼 덜어내고,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운항을 강행하는 무모함이 공교롭게 한 순간 집중되어야만 그런 대형 참사가 나는 줄 알았다. 흡입독성 시험은 건너뛴 채 넘어가고, “인체에 99.9% 안전하다”고 장담했으며, 홈페이지에 소비자 불만이 하나 둘 쌓여도 그저 무시하고 마는, 일련의 무책임이 누적된 결과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숫자(304명)보다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전국으로 뻗어나간 유통망을 따라 제 집 방 안에서 죽어갔다. 정부가 지금까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망자는 95명(전체 폐 손상 피해자 221명). 그러나 환경보건시민센터에 접수된 사망자 수는 239명(피해자 1,528명)이며 앞으로 추가 조사가 진행되면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 가습기 살균제가 시판되는 동안 800만명이 사용했다는 추산치를 감안하면 크고 작은 질환을 앓고 있는 피해자가 100만명이 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게다가 살균제 성분이 폐 손상의 원인이라는 정부의 연구조사 결과를 반박하기 위해 실험보고서 발췌 왜곡부터 황사 탓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옥시레킷벤키저 측이 들인 그 많은 수고를 보자. 악의도 없이 소비자를 죽이는 이런 탐욕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그래서 이제부터 나도 물먹는하마쯤, 데톨쯤 안 사는 수고를 자처하려고 한다. 일순간 달아오른 불매운동 바람이 아니다. 가습기에 부유물이 생긴다는 소비자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살균제 원료를 독성 물질로 교체하면서도 유해성을 검증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알고도 하지 않은 정황도 엿보이지만) 이 회사의 제품에는 차마 겁이 나서 손을 댈 수가 없다. 최소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다.

옥시의 제품군. 트위터
옥시의 제품군. 트위터

나아가 이 불매 선언은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다. 2006년 서울아산병원의 환자들을 보고도 역학조사를 벌이지 않아 피해를 키운 무관심, 2011년 가습기 살균제로 원인이 밝혀졌는데도 정부 부처들끼리 떠넘기느라 피해자 조사마저 늦어지게 만든 그런 책임방기를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잡아먹히기 위해 키워지는 가축의 비참한 처지에 공감해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됐다. 나의 연민의 폭은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지만 수백 명 아이와 엄마들의 억울한 희생에는 눈물을 아끼지 않겠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며, 영국 수사당국도 옥시의 본사 레킷벤키저의 책임여부를 조사하는 데에 동참하길 바란다. 이는 자국 기업 보호나 수사기관 간 공조 절차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인수를 전후한 시기에 의심스러운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제품을 만들었다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어떤 비윤리적인 기업의 책임을 규명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죽어간 생명은 먼 이방의 타인이 아니라 자칫 자국에서 희생됐을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인본주의의 이름으로, 영국 수사당국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기를 고대한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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