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11일부터 서울서 개인전… 90년대 후기 묘법 작품 전시
지난해 11월 6일~12월 20일 프랑스 파리 페로탱 갤러리에 무심한 듯 반복적으로 연필이 그어진 단색화 37점이 전시됐다. 한국 단색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박서보(84)가 예술의 도시에서 연 개인전이다. 유럽인들은 생소한 단색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 박서보의 작품을 본 로랑 르 봉 피카소미술관장은 “정교하면서도 힘이 있고 평면 작품임에도 조각 같은 입체감을 준다”고 평했다. 전시 작품은 절반 이상 팔려나갔다. 전시구성을 맡은 김용대 전 대구시립미술관장은 “프랑스의 국민작가 피에르 술라주의 작품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박서보가 1967년부터 그린 ‘묘법(描法)’이 2013년 서구 미술계에 소개된 이후 해외 전시를 통해 독자적 화풍으로 주목받고 있다. 박서보를 비롯한 5명 작가의 단색화 작품이 서구에 소개된 것은 조앤 기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2013년 출간한 ‘한국 현대 미술’에서였다. 이후 해외에서 그의 작품을 보려는 이들이 늘어났고, 지난해 9~11월 6명의 한국 화가가 참여한 미국 블럼앤포갤러리의 단색화 기획전에 이어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처럼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박서보는 단색화의 고유한 정서가 서구에서 독자적인 화풍으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서양의 미니멀리즘이라 불리는 작품은 완전히 하얗거나 검다면 한국의 단색화는 희끄무레하거나 거무스레하다”며 “작가는 숨고 자연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박서보의 단색화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이지만 그보다는 자연미가 느껴지는 추상화라는 것이다.
사실 ‘묘법’의 출발이 동양적인 체념에서 비롯했다. 연필로 비슷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반복해 그린 초기 ‘묘법’ 시리즈는 “아들이 3살 때 글쓰기 공부를 하다가 지쳐 마구 낙서하는 것을 보고 체념의 정서를 그린 것”이었다. 지금 해외에서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박서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의 요동이 사라졌다”며 “묘법 자체가 마음을 비우고 체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서보의 추상화들은 언뜻 봐선 뭔지 모르지만 주로 자연에서 착상한다. “한강 다리에 연결된 두 기둥, 제주도 모슬포항에서 본 하늘과 바다가 이어진 풍경, 이런 자연의 이미지를 마음 속에 쌓아 놨다가 작품으로 풀어낸 것이죠.”
서구의 일부 평론가들은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단색화가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대해 최대한 억제된 예술로서 등장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우환이 “단색화는 나름대로의 저항이었다”고 발언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박서보는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작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선을 그었지만 “시대가 남긴 상처가 어느 정도는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서보는 11일부터 31일까지 노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1996년부터 2001년 사이 작품과 그 밑그림인 ‘에스키스’를 공개한다. 90년대 시작된 후기 묘법의 특성을 볼 수 있다. 15일부터 홍콩 아트 바젤 페어, 5월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된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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