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메시지 강한 그림은 안 팔려
예술로 돈 벌 생각 애초에 포기
문제제기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
예술과 정치는 숙명의 원수
“환경, 통일, 여성, 입시… 세상에는 예술가로서 할 얘기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놈의 정치가 너무 형편없으니까 정치 말고 다른 것을 그릴 수가 없어요.”
문화예술인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텐트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광화문 광장. 이명박 박근혜 풍자화로 유명한 이하(48) 작가는 15일 그 격동의 현장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풍자화만 그려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권력을 풍자하는 그림과 사회적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그는 지난 10월 알려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두 번이나 올랐다.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과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는 이유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화가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왔다”는 그는 시간 날 때마다 광화문 광장에 들러 시민들의 모습을 캐리커처로 그리고 있다.
“더 자주 광장에 나와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며 그는 요즘 ‘퇴진 스티커’를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티커 제작부터 배송에 드는 비용은 모두 자비다. 지난 주 만든 1만5,000장 스티커는 일주일 만에 동이 나 5,000장을 추가로 주문했다. “230명한테 보냈는데 여전히 신청이 밀려 있어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다니까요.”
마흔 넘어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시작한 그가 처음부터 풍자화를 택한 건 아니었다. 2007년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떠난 미국에서는 “상업화가로 자리잡을 뻔”한 적도 있었다. “공모전에 작품을 낼 때마다 반응이 좋았어요. 최소 입선은 했으니까요. 아주 운 좋게 개인전도 열었고 히트를 쳤죠.”
그러나 “미술시장에 자신이 맞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나만의 예술을 하자’고 다짐했다. “한국 컬렉터들은 특히 보수화돼 있어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그림을 사지 않아요.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야 미술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풍자화가가 되겠단 결심과 함께 그는 ‘딱 3년만 열심히 하고, 멋있게 실패하자’고 생각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런 마음이었던 거죠. 그런데 벌써 3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직 안 죽었죠. 그리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은 여전히 많고요.”
귀국해 이 작가는 2010년 1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풍자화 50장을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종로 구석구석에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려움이 엄습했다. “혼자 포스터를 들고 30분을 고민했어요. 그러다 ‘가오가 있지’하는 생각이 들어 겨우 한 장을 붙였는데, 한 취객이 그림을 보고 엄청 좋아하는 거에요.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찰나의 희열은 포스터 50장을 순식간에 붙이게 하는 원동력이 됐고 지금껏 그를 풍자화가로서 살게 했다.
그런 식으로 퍼포먼스를 스무 번 넘게 했다. 검찰 기소만 여섯 번 당했고, 마흔 번 가까이 재판장에 갔다. 건조물 침입,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 교사, 경범죄처벌법 위반, 경범죄처벌법 위반 교사, 경범죄처벌법 위반 방조 등의 혐의로 현재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트라우마까지 생겼다”면서도 그가 권력을 조롱하고 풍자하기를 멈추지 않는 까닭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로 돈 벌 생각은 애초에 포기했다”면서 그는 “예술은 현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만드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예술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바꿀 힘은 가졌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 정치와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하 작가는 현 정권을 배웅하고자 ‘잘가박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 1탄으로 진행한 것이 ‘이하의 아트트럭.’ 모금을 받아 산 750만원짜리 1톤 트럭에 박근혜 대통령이 그려진 풍자화를 붙이고 2주 동안 전국 20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500원을 받고 50초 동안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이벤트도 진행했다. 하루 16시간의 강행군이었다.
“‘레임덕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포부로 시작했는데, 나가보니 이미 레임덕이 시작된 것 같더라고요. ‘괜히 왔나’ 생각이 들 정도로.” 트럭을 향해 삿대질과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난 대부분의 시민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트럭 주위에 몰려 현 정부를 비판하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얼마 전에는 ‘비선실세’ 최순실을 새롭게 그려 넣은 그림을 붙이고 천안에 다녀왔는데 두 달 전과는 반응이 또 달랐다. 완전히 성난 민심이었다. “고속도로에서 옆 차량들이 창문을 열고 트럭을 향해 환호성을 내지르는” 놀랄 광경도 벌어졌다. “내년 여름쯤 프로젝트 2탄을 계획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조차 없어진 것 같아요.”
‘블랙리스트 2관왕’이 그는 “자랑스럽다”고 했다. 문화ㆍ예술에 대한 억압과 간섭이 부쩍 심한 현 정부에서 “포함되지 않는 게 이상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권력의 억압과 미술계의 자체 검열 탓에 그럴싸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조차 열기 힘들고, 공모전 한 번 당선된 적이 없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덤덤한 표정이다. “얼마 전 홍성담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얘기를 하면서 ‘좀 더 열심히 하세요’라고 농담도 했어요.”
그는 요즘 ‘최순실 게이트’에 얽힌 인물들이 고구마 캐듯 줄줄 딸려 나오는 바람에 그릴 것이 많아져 무척 바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다음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청와대 인근에서 퍼포먼스를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요. 대형 프로젝터를 빌려 외벽에 작품을 쏘는 거죠. 괜찮지 않나요?”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