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영화 보면 펑펑 울지만
테이블 앞에만 서면 악바리로
크게 져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훈련 방해될라 여친도 없어요
유남규ㆍ승민형, 16년 주기로 金
“아, 독사한테 또 물렸어.”
정영식(24ㆍ미래에셋대우 탁구단)은 함께 탁구를 시작한 친구들 사이에서 ‘독사’로 통한다. 크게 지고 있어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역전하는 정영식을 보며 동료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18일(한국시간) 올림픽선수촌에서 만난 그는 “제가 여리고 예민한 편인데 지고 있으면 강한 오기가 발동한다”고 말했다. 리우올림픽에서 보여준 투혼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이날 남자탁구 단체전 3ㆍ4위전에서 독일에 1-3으로 패해 이번 대회 메달 획득에 실패했지만 정영식이라는 국민 스타를 탄생시켰다. 그는 단식과 단체전에서 난공불락인 세계 톱 랭커 중국의 마룽과 장지커(이상 28)를 고래심줄처럼 물고 늘어졌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팬들은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우리 영식이’라 부르며 큰 박수를 보냈다.
테이블 앞의 독사
정영식은 선한 눈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닌 ‘꽃미남’이다. 스스로도 “외모나 말투가 강하지 않아 경기장에서 손해를 볼 때가 많다”고 한다. 눈물도 많다. “슬픈 영화를 보거나 감동적인 경기를 보면 꼭 운다”고 했다.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서는 모습을 상상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마룽에게 역전패한 뒤 펑펑 눈물을 쏟아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테이블 앞에서는 ‘독사’다.
2010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태릉선수촌에 들어갔을 때 막내였던 그는 선배들과 똑같이 체력 훈련을 소화했다. 죽도록 힘들었지만 약해 보이기 싫어 버티다가 결국 연습 도중 실신했다. 김택수(46) 미래에셋대우 감독은 “그 때 싹수를 봤다”고 말했다. 중학교 시절 쪼그려 뛰기로 운동장을 돌다 종아리 골절상을 당한 적도 있다.
“오른손 부상을 당해 체력 훈련만 했어요. 운동장을 쪼그려 뛰기로 한 바퀴 돌면 나중에 세계랭킹 1위가 된다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었죠. 반 바퀴쯤 돌았을때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 그만둘 수 없었어요. 세계랭킹 1위가 돼야 하니까요.(웃음) 다 돌고 나서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니 종아리가 부러졌더라고요.”
태릉에서 그는 ‘연습벌레’로 통한다. 여자 친구를 만나면 훈련에 방해를받는다는 말을 고지식하게 믿고 스물세 살까지 연애도 한 번 안 했다. 유일한 취미는 아버지 어깨 너머로 익힌 바둑이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알파고와 이세돌 대국을 보며 누가 유리하다는 정도는 안다”며 웃었다.
정영식은 성인 무대에 데뷔한 뒤 국내 대회는 맡아놓은 듯 1등을 하고도 국제 대회만 나가면 죽을 쒀 ‘국내용’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하지만 작년 초부터 어깨에 힘을 빼고 타법을 바꿔 상승세를 탔다. 그 해 6월 호주오픈 단식에서 처음 정상을 차지했고 한 달 뒤 코리아오픈 2관왕으로 1인자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둔 올해 초 슬럼프가 왔다. “탁구 인생 중 가장 많이 훈련했는데도 랭킹 200위, 300위한테도 픽픽 졌다”며 “대표팀에 피해주는 것 같아 차라리 빠지겠다고 말할까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동료와 코칭스태프 눈을 피해 샤워실에서 물줄기를 맞으며 펑펑 운 적도 있다. 아버지 정해철(52)씨에게만 힘든 내색을 했는데 한 번은 아버지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보낸 영상 편지를 봤다.
“아들이 올림픽에서 잘 못해 국민들이 싫어할 까봐 걱정 된다며 우시더라고요. 그걸 보며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마음먹었어요.”
지구촌을 감동시키다
정영식은 독일과 남자단체 3ㆍ4위전에서 첫 단식 주자로 나서 바스티안 스테거(35)와 붙었다. 세트스코어 2-2에서 맞이한 5세트. 8-10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지만 내리 4점을 따 극적으로 승리했다. 펜싱의 박상영(21), 사격의 진종오(37)에 이은 또 한 번의 역전극이었다. 경기 뒤 “박상영 선수처럼 ‘할 수 있다’를 세 번 외쳤다”고 밝힌 그는 “박상영은 나이는 어리지만 본받고 싶다. 역전승의 영감을 줬으니 나중에 만나면 꼭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영식의 투혼에 지구촌도 감동했다. 인터뷰 도중 한 외국인이 악수를 청했다. 수단대표팀의 태권도, 유도 코치라고 밝힌 그는 “당신과 중국 선수의 경기를 봤다. 정말 대단했다”고 엄지를 들며 기념촬영을 요청했다. 정영식은 “메달도 못 땄는데 분에 넘치게 사랑해주셔서 감사하고 얼떨떨할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리우에서 노메달에 그친 아쉬움을 4년 뒤 도쿄올림픽에서 털어낼 각오다. 1988년 유남규(48), 2004년 유승민(34)에 이어 16년 만인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정영식이 금메달을 딸 거란 ‘16년 주기론’도 등장했다.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하겠다. (유)승민이 형도 2000년 첫 올림픽 때 단체전 4위를 하고 다음 올림픽 때 금메달을 땄다며 위로해주셨다. 4년 뒤 올림픽에 가면 중국을 꼭 넘어보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리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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