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자인 소설가 황석영, 방송인 김미화가 25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에 출석해 조사신청서를 냈다. 조사 신청서 제출 후 가진 간담회에서 황 작가는 “20세기 야만적인 매카시즘 시절에도 합법적인 제도 안에서 탄압도 하고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하고 했다”며 “21세기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한국은 더 치졸하게 뒤에 숨어서 보이지 않게 그것도 하수인들을 시켜 교묘한 방법으로 배제시키고 압박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가 이런 일을 자행했다는 건 문화 야만국의 치부를 드러낸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1년 한진중공업 파업을 지지하는 일명 ‘희망버스’에 동참한 이후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모함과 공격을 받았다는 황 작가는 “방북 직후 안기부(국가정보원 전신)와 공안 당국이 일방적으로 주장했던 혐의 내용을 교묘히 짜깁기 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인터넷 상에 유포했는데 이것은 국정원이 흘려주지 않고서는 일반인이 알 수가 없는 내용들”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황석영의 광주 항쟁 기록이 북한 책을 베낀 것이라는 주장 ▦황석영의 ‘님을 위한 행진곡’은 김일성 지령을 받아 공작금을 받고 영화와 함께 만든 것이라는 주장 등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2014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작가회의 성명서 발표에 대표로 나간 이후 주의 인물이 됐다. 황 작가는 “기자 회견 후 문화외교 사업에서 배제됐고, 2014년부터 해마다 국민은행 동대문 지점에서 검찰이 수사 목적에 의한 요청으로 금융거래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내게 통보되었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나에 대한 과거 안기부의 혐의 사실 발표문을 짜깁기하여 온라인 상에 배포한 최초의 인물과 그 배후, 문체부가 관여한 문예진흥위원회와 한국문학번역원의 황석영 배제 과정에 대한 사실을 밝혀달라”며 “검찰은 어떤 수사 목적으로 몇 년에 걸쳐 금융거래정보 제공을 요구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방송인 김미화는 “국정원의 (MB 블랙리스트) 발표가 있기 전부터 사실이 밝혀졌지만 발표 이후로도 오늘까지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사실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다"며 "참고인 조사를 받으면서 국정원에서 작성한 저에 관한 굉장히 많은 서류를 보면서 국가가 거대한 권력을 위해 개인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불쾌하고 화가 났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미화는 “그 사찰 문건의 맨 끝에 ‘김미화, 수용 불가’라고 적혀있다. KBS, MBC 등 여러 방송사를 지칭하면서 방송 출연은 물론 지방행사까지 적극적으로 막았다”며 “서류를 보기 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보고 나서 ‘과연 이것이 내가 사랑한 대한민국인가’ 생각이 들 정도”라고 덧붙였다.
25일 오전까지 진상조사위에 접수된 조사신청은 황석영, 김미화씨를 포함 56건이다. 한편 진상조사위는 유인촌 전 장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조사위 간사인 송경동 시인은 “유인촌 전 장관이 오늘 인터뷰에서 본인은 전혀 몰랐다, 문체부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는데, 그 부분을 명백하게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유인촌 장관 재직) 시절만해도 김윤수 현대미술관 관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정현 예술위 위원장 등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기관장을 강제로 솎아내던 공작이 있었는데 그걸 문체부 장관이 몰랐다는 부분은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덧붙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황석영 입장 전문>
나는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자행해온 블랙리스트 관련해서 이 자리에 나와 공개적으로 조사를 요청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작가로 살아온 지 오십년이 넘은 오늘까지 나는 언제나 비주류였고 제도권과 현실정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특히 극우 세력에게 광주항쟁 기록과 방북으로 낙인찍힌 나는 블랙리스트조차 필요 없는 불온한 작가로 지목된 지 오래 되어 일상적인 일이려니 하면서 당해오다가 정권이 바뀐 지금에 와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게 구차하고 치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속속 드러나는 예를 보면서 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며 더욱 심화되고 노골화된 좌우 편 가르기 정책은 이렇듯 민주주의에 심각한 퇴행을 초래했다.
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전 대선에서 재야인사들과 더불어 야당 후보단일화 운동에 나섰고 결국 야당 후보를 지지했다. 2007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다. 나는 2008년 재야 동료들과 의논 끝에 남북 관계를 전환하기 위하여 북방정책의 일환인 남북한 몽골과의 개발 안건 및 극동 시베리아 공동개발과 남북철도연결을 전제로 한 ‘유라시아 알타이 문화경제 연대’의 정책 건의안을 청와대에 제출했다. 2009년에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유라시아 순방에 동행했고 남북 지도자가 받아들여 일차적으로 서울에서 한국, 몽골, 중앙아시아 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예비 포럼이 열렸다. 그러나 정상회담까지 예상되었던 그해 말에 남북의 외교안보 상황이 바뀐다. 2010년 2월에 나는 청와대로부터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열리기로 한 ‘알타이 경제문화 포럼’에 참여하기로 했던 북한 측을 배제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대의명분을 잃었다고 보고 알타이 연합을 준비하던 모임에서 스스로 탈퇴했으며 한겨레 신문에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인터뷰와 함께 기고를 했다. 3월 말에 천안함이 침몰하면서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2010년 가을 무렵에 나는 우연히 광화문 거리에서 문화부서 출입을 하던 국정원 직원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충고를 겸한 주의를 주었다. ‘이제부터 정부 비판을 하면 개인적으로 큰 망신을 주거나 폭로하는 식으로 나가게 될 테니 자중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2011년 희망버스 동참과 대선 기간을 정점으로 나에 대한 모함과 공격이 인터넷과 SNS를 통하여 이어졌다. 나는 대선에서 재야의 야권 단일화 운동에 나서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국민연대’의 공동 대표를 맡은 뒤에 온라인을 통한 공격은 더욱 집요해졌다.
또한 방북 직후에 안기부와 공안당국이 일방적으로 주장했던 혐의 내용을 교묘히 짜깁기 하여 개인 블로그를 통해 인터넷상에 유포하였는데 이것은 국정원에서 흘려주지 않고서는 일반인이 알 수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내려와 폭동을 일으켰다느니 황석영이 쓴 광주항쟁 기록은 북한 책을 베낀 것이라는 등, 황석영이 제작한 ‘님을 위한 행진곡’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공작금을 받고 영화와 함께 만든 것이라는 등 허무맹랑한 사실 왜곡이 일반인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에 종편 등 이른바 보수매체가 아무런 비판적 검증도 없이 왜곡된 사실 등을 보도 방송하여 동조한 책임은 더욱 통탄스러운 처사였다.
일례로 나의 변호사는 어느 날 내게 겉보기에 멀쩡한 판사 한 분이 카톡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퍼 나르라며 보내왔다고 전달해 주면서 유포자들을 고소할 것을 권유했으나 소송을 하게 되면 몇 년 동안 글도 못 쓰고 시달리게 될 거라는 주위의 만류에 억눌려 참았다. 심지어는 이웃에서도 교장 선생들 모임에서 같은 내용을 퍼 나르는 것을 받았다며 전해 주었다.
아다시피 2015년에 보훈처장이란 자는 직접 나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제작된 노래라고 나의 이름을 적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이러한 왜곡된 사실을 극우단체의 이름으로 신문에 전면 광고하면서 황석영이 빨갱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망명과 투옥 등으로 수십 년간 작품을 쓰지 못하고 허비했으며, 비록 스스로 인정은 하지 않지만 국가보안법상 처벌을 이미 받았던 사람으로서 되풀이되는 모함과 명예훼손은 작가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 문화인에 대한 적극 관리와 억압이 노골화되었던 것은 대개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 발생 이후부터였다.
나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작가회의 성명서 발표에 대표로 나가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 이틀쯤 후 청와대에서 교문수석과 외교안보수석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요지는 그런 일에 내가 연루되는 것을 염려한다는 것과, 광주의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개작에 관한 글을 쓸 의향이 있는가 하는 것과 ‘통일위원회’에 들어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는 거절했다. 이는 회유와 압박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얼마 후 독일의 베를린 문학제에 초청을 받아 나가서 ‘세월호 사건’을 주제로 한 장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는 문예진흥위원회나 번역원의 지원 없이 베를린 문학 페스티벌측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하에 출국이 가능했다.
그나마 유진룡 문체부 장관 재임 시절이던 중에는 ‘런던도서전’의 한국 주빈국 행사에 동참할 수 있었고, 권영빈 문예진흥원장 시절이던 2013년까지는 예술위원회의 지원으로 파리 출판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2014년 로마대학이 주최한 ‘한국과 유럽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초청을 받았고 얼마 후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에 이태리에서 신간이 출판되어 직접 초청까지 받았던 나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확인했다.
2014년부터 해마다 6월이면 국민은행 동대문지점에서 검찰 측의 ‘수사 목적’에 의한 요청으로 금융거래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내게 통보되었다. 내 작품의 프랑스어 번역가인 어느 대학교수는 세월호 유족을 돕기 위한 모금행사에 성금을 보낸 후부터 같은 경험을 했노라고 고백했다. 또 다른 대학교수는 세월호 성명에 이름을 낸 뒤로 모든 해외 학술행사에 지원이 끊기고 배제되었다고도 말했다.
이 기간 중 내게 제의가 들어왔던 영화 두 편, 뮤지컬,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이 계약 단계에서 갑자기 ‘곤란하다’는 애매한 이유로 취소되었다.
2016년 3월의 파리 도서전은 한국이 주빈국이었다. 프랑스에서 10여 권의 번역서가 출간되어 프랑스인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음에도 나는 처음부터 행사 참가가 제외되어 있었다. 번역원 실무자들은 황석영 소설가가 빠진 한국주빈국 행사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하려고 도서전 조직위에 연락하여 그쪽에서 초청하여 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상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나는 프랑스 조직위 측에서 보내온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한 가장 저렴한 에어프랑스 표값을 받기로 하고 자비로 보태어 대한항공 편으로 출국했다. 도서전 기간 동안 프랑스 측은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총리가 한국관을 방문하고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행사장에 상주하다시피 하는데, 주빈국인 한국 측은 대통령은커녕 문화부 장관도 오지 않고 현지 대사도 심지어는 문화원장도 보이지 않는 처사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국 기자들에게 이 점을 지적했더니 그 내용이 기사화되어 한국에 그대로 전해졌다. 귀국하자마자 문화부 측에서는 ‘황석영을 참가시킨 자가 누구냐’고 번역원에 추궁했고 실무직원은 시말서까지 써야 했다. 이후 나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곤욕을 치른 번역원의 실무직원들은 박근혜 탄핵 후 블랙리스트 전모가 드러나자 ‘특검에 달려가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고 내게 소회를 밝혔다.
따라서 나는 세 가지의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1. 나에 대한 과거 안기부의 혐의 사실 발표문을 짜깁기하여 온라인 상에 배포한 최초의 인물과 그 배후.
2. 문체부가 관여한 문예진흥위원회와 한국문학번역원의 황석영 배제 과정에 대한 사실을 밝혀달라.
3. 검찰은 어떤 수사 목적으로 몇 년에 걸쳐 금융거래정보 제공을 요구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달라.
2017년 9월 25일 소설가 황석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