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 광대
권리 지음
산지니 발행·176쪽·1만2,000원
소설을 ‘언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이 책을 읽고 실망할지 모른다. 2004년 등단 후 꾸준히 장편소설을 써온 작가 권리의 첫 소설집은 장편소설과 시에 절반씩 걸친 밀도 높은 문장을 단편소설 완성도의 기준으로 삼는 국내 문단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소설의 알파와 오메가는 재미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이 책을 읽고 실망할지 모른다. 누가 봐도 소설 같은 이야기들은 너무 유명해서 뻔한 고전에 기대어 탄생했다. 표제작 ‘폭식 광대’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단식 광대’에 빚지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날 리 만무하다는 확신을 주는 이야기들은, 다만 영화 ‘옥자’처럼 현실을 밀도 높게 은유하고 예측한다. 동시대의 상징과 삐딱한 아이디어로 충만한 이야기들은, 읽는 내내 무수히 상상력을 자극한다. 소설 속 장면이 애니메이션처럼 머릿속에 그려지는 부수 효과는 보너스다.
이 책의 가장 빼어난 소설 ‘폭식 광대’는 폭식을 업으로 삼아 사는 남자의 이야기다. ‘키 150㎝의 자그마한 체구’인 그는 폭식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면서 계속해서 더 많이 먹어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여러분을 위한 탐욕의 악마가 되겠다”는 약속을 무대에서 지키다 끝내 “몸에 있는 구멍 여기 저기에서 온갖 배설물들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 “체내 조직들이 이상적인 세포 분열을 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몸이 아파트 벽을 뚫어버리면서 폭식 광대는 사회 암적인 존재로 각인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는 인간 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나의 암을 죽여도, 다른 곳에서 또 암은 생겨납니다. 이것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저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바로 그의 몸에 콘크리트를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단편 ‘구멍’은 가상의 빈촌인 게딱지 마을을 통해 강남 도곡동 타워 팰리스와 판자촌이 공존하는 현실을 냉소한다. 서울 최대 부촌인 백년구 한 중앙, 1,400가구 사는 무허가 판자촌 게딱지 마을에 밧줄을 가방에 넣은 정체 모를 노인이 출현한 후 곳곳에 싱크홀이 생긴다. 새 구청장 불도저는 재임기간 최대 과업으로 게딱지 마을을 없애고 마을 밑으로 흐르는 천연 지하수를 식수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잡고, 그 사이 싱크홀은 늘어 50가구를 제외하고 모든 집이 무너진다. 부촌과 빈촌 사이 십자가 한복판에 구멍이 뻥뻥 뚫리면서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와 폭스바겐과 미니쿠퍼가 희생 제물이 된다.
“구멍은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았다. 거식증 환자처럼 속이 메워지면 다시 토해내고 메워지면 또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구멍은 새로 땅을 찾아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예술의 허상을 고발하는 ‘광인을 위한 해학곡’, 막연하게 불안한 현대사회를 은유한 ‘해파리 medusa’ 역시 예의 독특한 상상력과 건조한 문체로 우리 시대 민낯을 그린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가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재개발 아파트 건설로 인해 터전을 빼앗긴 어느 소시민의 인터뷰 한 마디가 이 책을 탄생시켰다”고 밝혔다. 블랙코미디와 공포영화의 교집합 같은, 한편 당 40쪽 안팎의 짧은 이야기들은 ‘헬조선’의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소재로 시작된다. 읽는 것보다 읽은 소감을 타인에게 전할 때 할애할 시간이 더 많을 만큼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독자에게 던져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