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관련 뉴스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1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막한 4차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은 3국간 공조를 통해 북한 핵 포기를 위해 압박과 제재를 가할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중국도 전례 없이 ‘대북 제재의 완전한 이행’의지를 밝혔습니다.
한반도 사드 배치를 둘러싼 미ㆍ중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지난달 31일 토니 블링큰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강행하겠다”고 말한 반면, 시진핑 중국 주석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사드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계 정상들이 모여 북한 문제를 논의한 것은, 북한이 올 들어 4차 핵실험(1월 6일)과 광명성호 장거리 로켓 발사(2월 7일)를 잇따라 강행하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3월 2일)이라는 국제 사회의 압박에 6차례에 걸쳐 17발의 중ㆍ단거리 발사체를 쏘는 무력시위로 응수하고 있습니다. 31일부터는 GPS 교란으로 위협 방식도 다양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비춰보면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국제사회의 압박, 북한의 반발, 대화와 협정 체결, 약속 불이행에 따른 협정 무효화로 이어지는 역사는 여러 번 반복됐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북핵의 뿌리가 뽑힐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입니다.
쏟아지는 북핵 뉴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종합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감수하면서까지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부터, 미국은 왜 한반도 사드 배치에 집착 하는 지, 중국은 왜 대북제재보다 한반도 사드 배치를 더 문제 삼는 지, 일본은 왜 느닷없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선 것인 지 등의 질문 조각을 이어 붙여보면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커다란 퍼즐이 완성될 것입니다.
▦북한은 왜 핵을 선택했을까?
퍼즐의 첫 번째 조각은 ‘북한에게 핵 보유란 어떤 의미인가’ 입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조나단 폴락 외교정책 선임 연구위원은 저서 ‘No Exit’에서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를 한국전쟁에서 찾았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막대한 군사적 위력을 과시한 미국에게 공포를 느꼈습니다. 특히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위력에 큰 충격을 받았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까 봐 극도로 불안했습니다.
여기에 김일성은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후 북한과 자신의 안위를 중국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책에 소개된 당시 북한의 한 장성은 이런 상황을 “중국은 김일성을 벙커에 집어넣고 잠자코 있으라고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전후 복구를 위해 중국과 옛 소련에게 지원을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결국은 그들도 믿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경제와 안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북한은 재래식 무기를 운용할 자원조차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핵에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폴락 연구위원의 분석입니다.
▦한국전쟁 중 시도된 북한의 핵 기술 투자
이 때문에 북한 역사를 보면 핵 기술에 대한 초기 투자가 한국전쟁 중에 이뤄진 흔적이 나타납니다. 1952년 우라늄 탐사와 핵 과학자 훈련을 위한 북한과학원이 설립됐습니다. 이후 1955년 원자핵물리학연구소가 설립됐고 김일성대학교와 김책산업대학(현 김책공업종합대학교)에 핵물리학과를 만들었습니다.
2014년 통일연구원이 펴낸 북핵일지(일지 다운받기)를 보면 북한은 1956년 전후 복구를 명분으로 소련에 과학자를 파견하고 소련과 평화협정도 체결하면서 줄기차게 원자력 기술 이전을 요구했습니다. 덕분에 북한은 1963년 소련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고 1967년부터 이를 가동했습니다.
폴락 연구위원은 미국이 한반도에 전술핵무기(소형 핵무기)를 늘리던 1960년대에 북한에서도 핵무기 개발을 논의하고 핵공격 방어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1972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전술핵무기는 총 763개입니다. 남한에 핵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북한 입장에선 오금이 저릴 만도 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핵무기가 자위용’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1970년대 들어 북한은 핵 개발에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중국과 옛 소련 등 우방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금 조달에 나섰고 새로운 방식의 핵 기술 개발을 모색했습니다. 동맹으로 여겼던 중국이 원수인 미국과 핑퐁 외교를 하는 등 손을 잡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후 북한은 중국과 소련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내려놓았고 핵에 대한 열망을 집착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일본과 서유럽에서 외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들여오고 미국하고 관계 개선도 시도합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중동과 아프리카에 무기를 판매하고 39호실을 설치해 마약 밀매, 화폐 위조 등 온갖 불법 행위로 외화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핵 개발에 국제기구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는데, 폴락 연구위원은 북한이 IAEA의 원자로 기술 정보를 입수해 영변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이후 북한은 1985년 옛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핵무기 개발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 뒤 경제ㆍ기술협정을 체결하고자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습니다. 즉, 북한의 IAEA와 NPT 가입은 핵 개발 의지의 포기가 아닌 핵 개발 능력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통미봉남 전략의 수단이 된 핵 개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는 냉전이 종식되면서 북한의 핵 외교가 시작되는 아주 중요한 변곡점입니다.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운 상황에서 동독이 서독과 통일(1990년)했고 옛 소련이 해체(1991년)되면서 북한은 체제 유지에 극심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어서 북한은 1990년 한국과 옛 소련의 수교,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보면서 전략 변화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북한은 이 때부터 미국 등 서방에서도 원조를 받기로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여기에 북한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꺼낸 유용한 수단이 바로 핵이었습니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눈엣가시였던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전면 철수하도록 합의했습니다. 반대로 북한은 자국 핵에 대해서는 폐쇄적 정책을 취했습니다. 1992년 말 북한은 IAEA의 사찰 결과 핵 폐기물 보관 의심 시설이 발견되면서 특별사찰이 거론되자 군사시설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찰을 거부한 뒤 1993년 NPT에서 탈퇴했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은 북미 고위급회담을 갖고 미국과 실리적 통상 외교를 취하면서 남한 정부의 참여를 봉쇄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외교 전략을 취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아닌 미국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남북실무회담과 북미고위급회담 등을 거듭하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다가 IAEA마저 탈퇴합니다. 한동안 미국 등 국제사회는 대북 제재와 함께 ‘대북 공격’도 거론했고, 북한은 ‘서울 불바다’발언과 정전협정 무효화 선언을 주고받으며 험악한 기류를 이어갔습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은 핵 시설 해체를 조건으로 미국에서 경수로 2기와 중유를 제공받기로 한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2002년 미국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며 대북 강경 노선을 펴면서 북한에서 제네바 합의도 파기하고 맙니다.
이후에도 북한은 유화 제스쳐와 어깃장 놓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대북제재에도 아랑곳 않은 채 핵과 미사일 능력을 점점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북핵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그렇다면 당면한 과제는 북한의 핵 개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북한의 핵 개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국제 사회에서는 북핵이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단순 협상카드일 뿐이라는 시각과, 여차하면 핵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위 수단이라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전자로 보는 시각에서는 강력한 경제 제재 등 압박을 가하면 북한이 스스로 굴복하고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지난 MB정부와 박근혜 정부도 같은 입장입니다. 물론 후자로 볼 경우에는 이런 경제 제재가 통하지 않습니다.
60년이 넘는 북한의 핵 개발 역사를 돌아보면 쉽게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북한은 핵 무기 보유가 곧 생존이라는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북한은 국제사회에 ▲핵 보유국 지위 인정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경제 제재 해제를 요구합니다. 유시민 전 장관과 노회찬 의원은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북핵 문제(팟캐스트 듣기)를 다루며 북한의 요구에 대한 해법을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우선 북한의 핵 보유국 인정 요구에 대해서는 공식 핵 보유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5개국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인정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공식 핵 보유국인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처럼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는 의견입니다. 두 사람은 또 두 번째와 세 번째 요구에 대해 정전 체제를 끝내고 평화 체제를 정착시키면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해제와 함께 국제사회 편입을 통해 공고한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중국 압박, 일본 역할 확대로 달라진 미국의 국방 전략
세계 강대국들로 둘러 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국제 사회에서 북핵 문제는 단순히 남북한 문제를 넘어섭니다.
우선 중동에 치중했던 미국의 국방 전략이 중국과 일본 중심으로 달라졌습니다. 안보 전문가인 이춘근 박사는 미국이 2012년 국방예산 절감을 위해 발표한 ‘신국방전략’ 에 대해 “미국이 국방정책의 초점을 중동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라며 “신국방지침을 통해 미국 군사력의 대상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은 지난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개정해 일본 자위대의 역할을 폭넓게 인정해 주었습니다. 일본이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렇다 보니 일부 외교 소식통들은 지난해 12월 한국이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위안부 협상에 합의한 이면에 한미일 동맹 강화를 위해 일본의 짐을 덜어주려는 미국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미국이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주장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이 핵실험을 한 북한 제재보다 미국의 한반도 사드 배치를 물고 늘어지며 반대하는 이유 또한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한 안보 소식통은 이런 상황에 대해 “미국은 북한을 빌미로 중국을 견제하고, 중국은 정치적 완충지대인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 수 없는 처지”라며 “결국 북한과 미국이 갈등을 반복하며 적대적 공존을 하고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위은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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