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13명 한 집에 사는 이근후 명예교수
주거공간ㆍ출입문 다 분리… 불간섭 원칙
제사, 음식 각자 가져와 원하는 방식으로
15년째 3대 13명이 4층 집에 함께 사는 가족이 있다. 연로한 부모, 네 자녀와 그 배우자 3명, 손자손녀 4명이 한 건물의 공간을 나눠 산다.
전통을 지키는 가부장적 대가족으로 생각하면 오산, 이들의 동거 제1원칙은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이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시부모님 부탁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고, 어머니는 절대 사전 연락 없이 아들네 집을 찾지 않는다. 제사는 각 가정이 한 가지 음식을 준비해 모인 뒤, 기도든 절이든 원하는 방식으로 치른다.
이 참신한 공동체모델의 주인공은 이근후(84) 이화여대 의대 명예교수의 가족이다. 이 명예교수는 50여간 정신과 전문의로 환자들을 돌보고, 은퇴 후엔 1995년 (사)가족아카데미아를 창립해 예비노인ㆍ부모 교육 등을 하고 있는 노인 및 가족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4ㆍ19 시위로 수감됐을 때 주위 수감자들을 보며 “왜 어떤 이는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분노하고 힘들어하는데, 어떤 이는 큰 어려움도 편히 받아들이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인간과 삶에 대해 고민한 일”을 계기로 정신과 전문의의 길을 걸었다.
그가 나이 듦의 즐거움을 쓴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갤리온)는 출간 4년 만에 80쇄를 찍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신영동 가족아카데미아 연구실에서 만난 이 명예교수는 “즐거운 노년을 맞을 수 있는지 여부는 변하는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가, 즉 적응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억울해하거나 노여워하지만 않는다면 노년은 굉장히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노여워하지 않기가 쉽지 않지만.(웃음)”
-함께 사는 방식이 신선하다.
“주위에서 부러워하며 방법을 많이 묻는다. 어려서부터 교감이 있지 않으면 쉽지 않다. 내 경우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가정을 꾸려 독립하더라도 완벽히 갖추고 시작하기보다 하나하나 장만해 가며 사는 삶이 즐겁다’는 걸 자주 강조했다. 또 ‘공부는 원하는 만큼 시켜주겠지만 결혼할 때는 딱 현금 500만원만 보태주겠다’고도 못박았다. 애들이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전세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장남 내외가 지금의 형태를 제안했다. 각자 살던 전세금을 합치면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었고, 형제들은 부모를 함께 모시고 육아에 우리 손을 빌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불간섭 원칙은 어떻게 나왔나.
“처음에 자주 의논하고 제가 강조해서 원칙을 세웠다. 불간섭 원칙 없이는 함께 산다는 것이 짐이 된다. 건물만 같지 주거공간, 출입문은 다 분리하고 각자 개인 업무를 우선하도록 했다. 아내가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이내 적응해 뭐 주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며느리나 자식들에게 ‘원하는 사람 찾아가라’는 이메일을 보내고 일체 돌발적으로 방문하지 않는다.”
-거절법은 왜 가르쳤나.
“억지로 부탁을 들어 주다 보면 나중엔 기분이 나빠 안 해주는 상황이 생긴다. ‘싫어요’가 아니라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안 돼요’를 스스럼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한 거다. 그래야 오래 함께 즐겁게 지낸다. 처음 같이 살기 시작할 때 5대 헌장을 정했다. ‘각자 고유의 가치관, 종교관을 가지고 간섭 없이 살아간다’이고 ‘같음은 나누고 즐기고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 등이다.”
-자식으로부터 효도 받고 싶다거나 사랑 받고 싶다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
“효도라는 단어 자체가 요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예비노인 교육에서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효도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 좋은 인간 관계를 맺자고, 소통을 하자고 하면 된다. 결국 같은 뜻인데 효도는 받기만 하는 뉘앙스를 준다. 많은 노인들이 자녀를 제 손안에 쥐락펴락하려 한다. 결국엔 거기에 감정을 소모하느라 스스로 인생도 즐기지 못한다.”
-희생을 많이 했다면 감정적 독립이 힘들 텐데.
“꼭 자식에게 돈을 물려줘야 한다거나 내 생각대로 성공시켜야 한다고 착각하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아 우리 부모님이 정말 행복하게 살았구나, 즐겁게 성숙하게 인생을 보냈구나’하는 경험이나 기억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변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노년에 억울해하고 노여워하는 분들의 생각 중 하나가 ‘내가 말하는 대로 해야 자식이 성공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무조건 어른 말 들었다간 손해 보는 세상이다. 스마트폰 들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그걸 써본 일이 없는 할아버지가 뭘 자꾸 가르치려고 들면 어긋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거꾸로 애들 말을 내가 듣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야 노여움이 없는 노년이 된다.”
-예비노인 수업엔 어떤 분들이 오나.
“90년부터 시도한 수업인데 그때는 먹히질 않았다. 퇴직할 분들이 많이 오긴 했지만 실감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최근 부쩍 절박함이 늘어난 것 같더라. 어떻게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분들, 죽음에 대한 기본적 공포를 극복하기 힘들다거나 정서적으로 수용이 안 되는 분들, 내 욕구나 실생활의 갭 때문에 우울한 분들 등이 있다.”
-나이 듦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는.
“교직에서 퇴임식을 많이 봤다. 퇴임하고 나가는 분들은 어떻게 사시는가 궁금해 일부러 안 빠지고 늘 참석했다. 퇴임자들은 크게 두 가지였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배우려는 희망에 가득 찬 분들과 과거 현직 때 일을 놓고 분노하고 탓하는 분들. 무언가 새 삶과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히 늘 전자였다.”
-어떤 차이였을까.
“어떤 자극이라도 늘 승화시키는 쪽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한 거다. 자극에 반응하는 것도 두 가지다. 자극에 대해 늘 남탓을 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고,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우회해 자신에게 보탬이 되도록 만드는 반응이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자극은 너무나 많다. 거기에 하나하나 매달려 있다가는 살아가기 어렵다. 슬픔, 갈등이 어떻게 아예 없겠나.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 에너지로 전환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이 들기 전부터 에너지 전환의 근육을 키워야 할까?
“그러면 좋겠지만 쉽진 않다. 나이가 들어야만 차츰 쌓인다. 그러니 세상이 공평한 게 아닐까. 젊을 땐 화내고 노여워하고 분노해도 회복할 기운을 주고, 나이가 들면 그럴 기운이 없으니 노여워하지 않는 지혜를 주고.
-되레 나이 들수록 노여움이 커지던데?
“젊을 때 쌓였던 억울함을 폭발시키는 건데, 사실 누구나 그런 억울함이 있다. 나도 식당에서 잃어버린 우산을 찾아내라고 주인을 훈계하고, 지하철에서 속으로 젊은이들을 괘씸해했다. 돌아보니 그게 다 몽니고 시샘이고 노여움이더라. 스스로 노력하고 깨달아야 한다. 아무래도 노력하는 분들은 아닌 경우보다 통찰을 얻을 가능성이 클 거다.”
-감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장사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손해 보고 장사하지 않듯 자기 몸이나 마음을 위해 밑지는 행동은 하지 않으면 된다고 마음 먹는다. 별 것 아닌 것을 기어이 이기려다 몸도 마음도 평판도 상한다. 흔히 타협을 부정적 어휘로 생각하는데 정신적으로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다. 좋은 말로 적응이다. 추우면 옷을 입듯 상황에 내 감정과 태도를 적응시키려는 노력을 늘 해야 한다. 그래야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웃음)
-즐거움은 어디서 얻나.
“한 칼럼에서 즐겁게, 지혜롭게 나이들려면 스마트(SMART)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망상 없이 단순하게(Simple) 생각하고, 운동(Moving) 등 몸 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정서적(Artistic)인 감각을 유지하려 애써야 한다. 초조해하지 말고 긴장을 풀고(Relax), 무엇보다 남들과 어울려(Together) 나이 들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얘기였다. 젊었을 때 억울했다고, 노후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고 반드시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뭐든 더 해볼 각오가 생길 수 있다. 그런 분들에게 노년은 축복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 얘기들을 너무 교훈적으로 쓰진 말아 주세요. 나이 들수록 중요한 건 재미있게 버티기, 유머거든요.” 과연 “노년이 됐다고 점잖은 얼굴로 세상 통달한 것처럼 굴긴 싫다”는 그다운 당부였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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