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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2) 야구는 내 인생의 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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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2) 야구는 내 인생의 은인

입력
2010.10.24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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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됐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친구네 집에서 먹고 자는 것도 여전했고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도 여전했다. 학교는 그저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공부는 남의 일이었다.

절망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이혼은 어린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대광중학교 입학 초기에는 ‘그래 공부를 열심히 해보자’라는 다짐도 여러 차례 했었다. 하지만 그런 각오나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내 다짐이 실천되기에는 모든 환경이 너무 열악했고 나 역시 연약하기만 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던 부잣집 외동아들에서 졸지에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돼 버린 나는 부끄러움과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한번 해보자’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지만 이미 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문제아로 전락하고 있었다.

1학년 2학기 들어서부터 나는 툭하면 아이들을 두들겨 팼다. 교무실 ‘단골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교무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선생님들 보기가 부끄러워서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말자’고 결심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 안의 외로움과 울분이 나를 늘 반항적인 아이로 만들었다. 교무실에 수도 없이 끌려가다 보니 나중에는 부끄러움도 모르게 됐다.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든 채 벌을 받는 것도 견딜 만했다.

내가 교무실에서 벌을 받을 때마다 선생님들은 한마디씩 했다. “저 녀석 또 왔네, 아예 자리 하나 만들어줘야겠어” “여기가 네 교실이냐” “넌 어떻게 된 녀석이 교실보다 교무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 “도대체 학교에 공부하러 다니는 거야, 사고 치러 다니는 거야” 등.

어느 날은 교무실에서 벌을 받고 나오다 나를 보고 키득거리는 친구들을 두들겨 패서 다시 호출당하기도 했다. 인자하신 담임선생님마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하일성, 너 성적이 이게 뭐야. 초등학교 때는 공부도 잘하고 입학했을 때만 해도 성적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 선생님은 끝없이 추락하는 내 성적과 툭하면 친구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내 행동에 대해서만 꾸중했다. 나는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2학년에 올라갔을 때 성적은 이미 바닥이었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여건도, 의욕도 없었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사실상 가출 상태였기 때문에 집을 떠난다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친구네 집도, 외할머니 댁도 다 싫었다. 그저 떠나고만 싶었다. 그때 어머니는 홍콩에 계셨는데 그 무렵 나는 홍콩으로 훌쩍 떠나는 꿈만 자주 꿨다.

아버지는 1년에 서너 번 만났다. 아버지는 내가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차마 친구네 집에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대로 말씀 드리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나는 중학교 때 친구네 집에서 지냈던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마음 붙일 곳 없는 내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야구 유니폼을 입은 이충순 선배였다.(이 선배는 나중에 프로야구 롯데 한화 등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이 반에 하일성이라고 있어? 나 좀 보자.” 이 선배는 다짜고짜 나를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일성아, 너 운동 잘한다면서. 나랑 야구 한 번 안 해볼래?”

사실 나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축구 핸드볼 야구 등 공으로 하는 운동에는 소질이 있었다. 아마도 그 소문이 야구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 선배는 내게 야구부 가입을 권유했다. 마땅한 계기가 없어서 그랬지 나는 야구부에 들어가고 싶었었다.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을 달리며 우렁찬 소리를 내뱉는 야구부원들만 보면 가슴이 탁 터지는 듯했다.

“부모님과 상의해서 허락 받아와라. 그러면 내가 감독 선생님께 말씀 드릴게. 감독 선생님은 네가 운동 잘하는 것 알고 계시니까 쉽게 허락하실 거야.”

“형, 그냥 들어가면 안 돼요? 부모님도 찬성하신다고 하셨는데.” 사실 부모님 허락은 안 받았다. 아니 허락을 받을 부모님이 안 계셨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야구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광중 야구부원이 됐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하는 야구는 내 적성에 딱 맞았다. 적성에 맞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었기에 외로움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성적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어서 좋았다. 야구부 가입을 권유 받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던 이유다.

나는 야구부에서 인기가 좋았다. 선배들은 말을 잘 듣는 나를 좋아했고 후배들은 따뜻하게 대해주는 나를 잘 따랐다. 나는 운동도 제법 잘했다. 2루수를 보면서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몇몇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하기 위해 나를 주목했다.

돌이켜보면 만일 야구를 안 했다면 나는 나쁜 길로 빠졌을 것이다. 야구를 함으로써 내 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야구를 함으로써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야구는 내 인생의 은인이다.

2학년 가을 연맹전에서는 타격상까지 받았다.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대광중 야구부에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덕분에 애국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상도 받았다.

안타깝게도 대광중은 야구를 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칫하면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간신히 야구에 재미를 붙였던 나는 다시 옆길로 새기 시작했다. 야구에 신경을 쓰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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