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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8> 소꿉장난 같았던 신혼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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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8> 소꿉장난 같았던 신혼시절

입력
2010.12.05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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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따금 사진첩에 있는 신혼시절의 빛 바랜 사진을 꺼내 본다. 그렇게 마음 졸여가며 인숙과 결혼한 게 정말 엊그제 같은데, 내가 남의 결혼식에 주례를 수십 차례 섰으니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다.

결혼식을 올린 지 35년이 지났지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신랑 친구들은 결혼식을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벼른다. 이유는 뻔하다. 결혼식 때 신부 친구들과 혹시 인연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들러리로 만나 결혼까지 골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그런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다. 내 결혼식 때 하객으로 온 사람들은 대부분 양곡종합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신부 하객은 양곡종합고등학교 졸업생이거나 재학생이었다. 우리 부부와 마찬가지로 사제지간이었다.

나는 로비에서 동료 교사들을 맞으며 넉살 좋게 농담을 던졌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 서 계시면 어떡합니까, 얼른 신부 친구들 골라 보세요. 사람 많아요.” 결혼식장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결혼식 후 사진 촬영. 신랑과 신부 친구들은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어쩜 계집애, 선생님을 꼬셔서 결혼해, 여우 같으니라고.” “아냐, 인숙이보다 선생님이 더하지. 하 선생님이 그러실 줄 몰랐는데 남자들은 다 늑대라니까.”

동료 교사들인 신랑 친구들은 신부 친구들의 ‘생활지도’에 바빴다. “거기 아가씨들, 숙제는 다 하고 돌아다니시는 건가, 학생이 화장해도 되나. 이따 교무실로 오도록!”

이에 질세라 신부 친구들도 정면으로 맞불을 놓았다. “무슨 신랑 친구들이 이렇게 늙었어요. 혹시 신랑감이라도 있나 해서 왔는데 완전히 망쳤네. 미장원 다녀온 게 괜한 헛수고였어!”

지금도 결혼사진을 보면 학교 강당에서 찍은 건지, 예식장에서 찍은 건지 헷갈린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혼식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신혼 초에 아내는 스승과 제자에서 남편과 아내로 바뀐 우리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늘 수줍은 모습 그대로였다. 문제는 신혼이라고 해서 조금도 봐주지 않는 내 선배 친구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어댔다. 심지어 냄새 나는 양말과 속옷을 벗어둔 채 새 것으로 바꿔 입고 가기도 했다.

우리 집은 한마디로 내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심지어 장기 투숙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입고, 신고 나가는 사람이 임자였다. 어느 날은 거리에서 한 남자를 마주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옷인데’라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생각났다. 언젠가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었던 후배가 내 옷을 입고 돌아다닌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고맙게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고린내 나는 사내들의 뒤치다꺼리를 군말 없이 다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아내가 정말 사랑스럽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강인숙과 결혼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아내가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늘 내 친구이자 동반자였고 후원자였다.

신혼 초 우리는 호칭 때문에 한동안 애를 먹었다. 나는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해서 “강인숙”이라고 불렀다. 아내는 결혼 후 2년 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정식 부부가 됐지만 호칭만은 여전히 사제지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내를 크게 부를 일이 있으면 이름을 외친다. 30년이 넘도록 함께 살다 보니, 아내는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진다. 신혼 때는 내가 일방적으로 타이르고 알려주고 성내고 약 올렸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내가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

나와 아내는 일곱 살 차이다. 요즘은 그보다 더 나이차가 나도 아무런 문제될 게 없지만 그때는 일곱 살이 꽤 큰 차이로 여겨졌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로 만난 우리 부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신혼생활은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스승의 날에 아내한테 꽃을 받는 사람이 대한민국을 통틀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1984년에 교단을 떠났지만 아직도 스승의 날이 기다려진다. 아내가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내 가슴에 화사한 카네이션을 달아주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야 꽃 선물이 흔하지만, 환갑이 넘은 내 나이에 아내한테 꽃 선물을 받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내는 매년 5월15일 내 가슴에 분홍색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늘 그렇게 인사한다. 아내는 스승의 날이 되면 평소보다 훨씬 더 친절해진다.

스승의 날이 되면 우리 집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일반적으로 아내의 친구들과는 굉장히 조심스럽고 어려운 사이다. 하지만 내 아내의 친구들은 전부 제자들이기 때문에 허물없고 편하다.

나는 아내의 친구들을 전혀 ‘죄책감’ 없이 껴안는다. 아내의 친구들, 아니 내 제자들은 30년 전 그 모습 그대?“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제 다들 50세를 넘긴 중년이지만 여고생 때 모습과 다르지 않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남자 제자들이다. 내가 근무하고, 내 아내가 다녔던 학교는 남녀공학이기 때문에 남학생이 절반이었다. 이 친구들은 나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아내에게 깍듯하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자리만 비우면 “인숙아”라고 반말한다. 그러다 내게 들키면 자지러지게 웃는다.

이제 어떤 제자들은 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제자들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엽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됐지만 내 기억 속에 제자들은 여전히 고등학생이다. 일찌감치 교단을 떠나긴 했지만 교사 되기를 참 잘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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