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못해 상처 주면 어쩌나 고민
다큐 보고 필리핀도 다녀와
낙천적인 그들 유쾌하게 연기
대학로 무대 20년 큰 자산으로
막장에 가까운 KBS1 일일극 ‘당신만이 내 사랑’의 내용은 뻔하다. 가난 때문에 남편과 딸을 버린 비정한 여자가 부잣집 사모님으로 변신한다. 여자의 친딸과 양딸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맞선다. 출생의 비밀의 물론이고 과거 두 가정의 부부가 서로 뒤바뀌는 설정도 엽기적이다. 과연 공영방송에서 내보내는 드라마가 맞나 싶을 정도다.
막장 요소와 무관하게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이름부터가 낯선 남순 버젤리오 리, 한국이름 이남순으로 출연하는 배우 김민교(42)다. 까무잡잡한 피부로 동그랗게 눈을 뜨고선 “아니니다”(아닙니다), “개차스니다”(괜찮습니다)라는 어눌한 대사를 능청스럽게 풀어낸다. 그는 실제 코피노(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로 보일 정도의 정교하면서도 재치 있는 연기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지난 16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일보 편집국을 찾은 김민교와 만나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드라마 초반 남순은 그저 주변인이었다. 드라마가 시작한지 한 달여가 지나자 반응이 나왔다. 드라마 홈페이지 시청자게시판에는 “남순이 분량을 늘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당신만이 내 사랑’은 남순이 한국인 아버지를 찾지 못하면서 필리핀으로 가네 마네 하는 내용만으로 두 달 분량 방송을 채웠다.
“처음에 코피노 역할이 주어졌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잘못 연기하면 그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고, 단순 화젯거리로만 전락할 수 있으니까요. 슬픔이 있는 인물이지만 희극적으로 접근해보기로 했죠. 희극 연기는 자신 있었으니까요.”
김민교는 국내에 거주하는 코피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 시청했다. 직접 필리핀으로 날아가 한 여행사의 지인을 통해 코피노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 없이 그저 태어난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코피노”라고 말했다.
방송 초반 대본 어디에도 남순이 외모나 말투, 표정,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철저하게 김민교 혼자 캐릭터를 구현해갔다. 중반 이후 비중이 커지면서 늘어난 대사가 그를 압박했다. 어느 순간 대본에 적인 대사도 ‘다녀와스니다’, ‘아니니다’ 등으로 표기됐다. 배역을 향한 김민교의 열정이 통한 순간이었다.
김민교는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20여년 가량 활동했다. 연기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 극본과 연출까지 손을 댔다. 지금도 대학로에서 공연되는 연극 ‘광수생각’과 ‘발칙한 로맨스’ 등을 연출한 경력도 있다. ‘발칙한 로맨스’는 직접 극본을 쓰기도 했다.
장진 감독의 눈에 들어 케이블 오락채널 tvN의 ‘SNL 코리아’(SNL)의 초창기 멤버로 합류해 3년 반 동안 출연했다. 큰 눈 때문에 ‘눈알 맨’이라는 캐릭터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드라마 출연 제안 받았을 때는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남순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고민 끝에 ‘신보살님’과 상의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상의 뒤 드라마에 전념했다. “예측한 내용이 매번 들어맞는다”는 ‘신보살님’은 유명 개그맨 신동엽이다.
김민교는 “배우로서 자리를 잡게 활시위를 당겨준 건 장진 감독이고, 활시위를 튕겨준 건 동엽 선배”라고 말했다. 오랜 연극무대 생활과 코믹 연기 이력은 그에게 큰 자산일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 여장도 하고 곰 탈을 쓰고 걸그룹 EXID의 ‘위 아래’ 춤도 췄습니다. 가족을 찾는 과정에선 눈물 연기로 희극과 비극을 오갔어요. 이런 연기를 어디서 또 해보겠어요?(웃음)”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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