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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별세… 반성과 저항의 펜으로 파고든 獨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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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별세… 반성과 저항의 펜으로 파고든 獨의 양심

입력
2015.04.1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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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는 스물한 살이다, 오스카야. 너는 자랄 것인가 말 것인가? 너는 고아다. 너는 결국은 자라야 한다. 너의 불쌍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너는 이미 절반은 고아였다.” (‘양철북’ 중)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13일 별세했다. 소설 ‘양철북’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그라스는 전후 독일 사회의 죄의식을 가장 냉철하게 파고든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다.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는 “20세기 독일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가가 세상을 떴다”며 “오늘날 독일이 유럽으로부터 존경 받는 국가가 된 것은 과거 청산을 문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그라스의 덕이 크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1927년 10월 16일 폴란드 단치히(현재의 그다니스크)에서 식료품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어머니는 슬라브계 소수민족인 카슈바이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17세 때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징집되어 복무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얻은 죄의식은 훗날 그라스의 문학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문학보다 미술에 먼저 관심을 보였던 그라스는 전쟁이 끝나자 뒤셀도르프와 베를린에서 조각과 그래픽을 공부했다. 농장노동자, 그래픽 아티스트, 조각가, 재즈 음악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20대를 보낸 그는 1954년 서정시 대회에서 입상하고 사회에 비판적인 문인들의 모임 ‘47그룹’에 가입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47그룹’은 비공식 모임이었지만 당시 문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조직으로, 나치 치하의 선전 문구에 쓰였던 복잡하고 장식적인 산문 스타일에 철저히 맞서며 자신들만의 문학 언어를 발전시키고 사용한다는 공통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47그룹’에 대해 “한국 유신독재 시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저항적인 작가모임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며 “그라스가 독일 통일 과정에 비판적으로 대응한 방식도 국내 작가들이 통일을 바라보는 시선에 여러 시사점을 던졌다”고 회고했다.

그라스는 1958년 ‘47그룹’ 모임에서 그의 대표작이 될 ‘양철북’의 미완성 초고를 강독했으며 이듬해 책으로 출간했다. 세 살 때 추락사고로 난쟁이가 된 오스카 마체라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나치 점령기부터 2차 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사회상을 촘촘히 그린 소설로, 독일 자본가 계급에 대한 불쾌한 묘사와 죽음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때문에 자국의 비평가들과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작품은 게오르크 뷔히너 상, 폰타네 상,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영화로도 제작돼 1979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라스는 이후 중편소설 ‘고양이와 쥐’(1961), 장편소설 ‘개들의 시절’(1963)을 연달아 발표, ‘양철북’에 이어 고향 단치히를 무대로 2차 대전의 참상을 그린 ‘단치히 3부작’을 완성했다.

‘달팽이의 일기 중에서’에서 그라스는 날카로운 현실 고발을 특유의 위트 안에 녹여내며 또 다른 문학적 양식을 구축한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풍자와 판타지적 요소가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넙치’(1977)에서는 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양성 간의 투쟁의 역사를 말장난, 음식, 성을 통해 유쾌하게 그려냈으며, ‘텔그테에서의 만남’(1979)은 30년 전쟁 당시 독일 시인의 모임을 허구로 그려냄으로써 ‘47그룹’의 활동을 회고했다. 김누리 교수는 “그라스 문학은 미학적 수준을 견지하면서도 사회적 발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학”이라고 평가했다.

그라스의 초기작에서 드러난 날카로운 현실 비판은 작품뿐 아니라 현실의 정치활동으로도 드러났다. 그는 1960년대 사회민주당 당수이자 친구인 빌리 브란트를 위해 선거운동에 참여했는데, 전쟁 기간 동안 나치군으로 복무했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당시 총리를 낙선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때의 선거 경험을 바탕으로 1972년 ‘달팽이의 일기 중에서’를 발표했는데 훗날 인터뷰에서 “특정 인종의 집단살해라는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콘라트) 아데나워가 총리였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정치인들은 과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과거에 대해 말하면, 악마가 우리 역사에서 불쌍하고 가여운 독일 국민들을 배반했던 끔찍한 때라고 했다.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실제로 어떻게 이 일이 한낮에 버젓이,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일어났는지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고 했다.

황석영씨는 “그라스는 독일의 과거 청산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핍박 받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며 “70, 80년대 우리나라 군사독재에도 반대했으며 내가 체포되거나 감옥에 갈 때도 앞장 서서 구명운동 해주셨다”고 말했다.

1990년 독일이 통일했을 때도 그라스는 그 과정의 졸속성을 문제 삼아 공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하나였다. 그는 통일된 독일에 적합한 헌법이 없다는 점, 서독이 동독을 합병하는 형태를 띰으로써 동독의 문화가 뿌리째 사라지게 됐다는 점 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같은 해 이 문제에 대한 강연과 연설문, 토론을 모아 두 권이나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세계 평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계속돼, 독일 국경의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 그곳의 환경오염 실태를 고발한 ‘숲의 죽음’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에 밝혀진 나치 친위대 복무 전력은 적잖은 논란이 됐다. 그라스는 2007년 발표한 회고록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자신이 10대 때 나치 친위대로 복무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나치를 비판해 온 그가 나치 내 가장 악랄한 조직에서 병사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라스는 당시의 경험을 책을 통해 상세히 기술했고 자신은 결코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독자들에게 섣불리 예단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로 인해 작가로서 그라스의 위상이 실추됐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솔직한 자기고백은 그가 작품에서 보여준 양심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2002년 5월에는 ‘넙치’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을 찾았다.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김누리 교수는 “그라스와 함께 남대문 시장을 방문했는데 그가 달러 환전하는 할머니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할머니의 주름 속에서 한국의 역사를 본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미술을 공부했던 그라스는 남대문의 할머니들에게 얼굴을 그려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할머니가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한국의 역사를 그리는데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독일의 양심이자 세계의 대표적인 지성이었던 그라스는 생전에 문학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돌을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시시포스의 신화’를 비유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정치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문학 역시 단 번에 세상을 바꿀 힘이 없지만 인간의 실존은 돌을 굴려 올리는 그 행위를 통해 만족된다.

“책이 어느 정도까지 사람을 바꿀까요? (…) 저는 최종적인 목표를 믿지 않습니다. 돌이 산꼭대기에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 신화는 비록 독일 관념론을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이상주의와 이데올로기에 적대적인 입장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조건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서양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궁극적인 목표, 즉 행복하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약속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 돌은 항상 우리로부터 미끄러져 내려가서 다시 굴려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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