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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11> 방송은 또 하나의 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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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11> 방송은 또 하나의 그라운드

입력
2010.12.26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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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TV 연예 프로그램에 처음 출연한 것은 1984년이다. 임성훈씨가 진행하던 ‘유쾌한 청백전’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청군, 백군 나눠서 노래 대결을 펼치는 식으로 프로그램은 전개됐다.

나는 그 해에 KBS 야구해설위원으로 TV에 얼굴을 자주 비쳤기 때문에 방송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다. 또 연예인들도 제법 알게 됐다. 하지만 연예 프로그램 출연은 처음이었다. 첫 출연이라 좀 긴장했지만 막상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딱히 어려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적당히 농담을 섞어 가면서 잘 대처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녹화였다.

그렇게 한 번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나니 다른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계속 들어왔다.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연예인 말고 나만큼 오락 프로그램에 많이 나간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의 리퀘스트’ ‘TV는 사랑을 싣고’에는 세 번씩이나 출연했다. ‘TV는 사랑을 싣고’에서는 세 사람을 찾았다. 첫 번째는 중학교 때 선생님을 찾았는데 돌아가셔서 뵐 수 없었다. 두 번째는 함께 야구를 시작했다가 고1때 전학한 친구를, 세 번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주부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아침마당’프로그램에도 자주 얼굴을 비쳤다. 방송에 나갈수록 내 입담은 늘었다. 때문에 방송가에서는 하일성을 꽤 괜찮은 패널로 평가했다. 2005년에는 ‘지금은 라디오 시대’라는 프로그램의 공동 MC를 제안 받기도 했다. 솔직히 이 프로그램은 정말 한 번 진행해 보고 싶었는데, 다른 방송사 프로그램이라 출연할 수 없었다.

나는 영화에도 몇 번 출연했다. 1986년 이장호 감독의 ‘외인구단’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잠깐 얼굴을 비쳤고, 2년 후 속편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역전에 산다’(2003)에도 출연했다.

방송 출연을 앞둔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 물끄러미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은 내 얼굴이었다. 좋게 말해서 구수한 거지, 투박하고 촌스러운 얼굴이 어디 가겠는가? 그렇지만 기왕 거울 앞에 선 김에 나는 이런저런 포즈와 표정을 지어봤다. 그런데 뒤에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와, 우리 아빠 멋지다. 탤런트 시험이 언제예요?” “어머 나이 들어서 뭐 하는 거예요? 호호호.” 아내와 딸들은 포복절도했다.

한 번은 퀴즈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이렇게 물었다. “박 PD, 하나 물어 봅시다. 그나저나 왜 나를 자꾸 섭외하는 겁니까? 잘생긴 것도 아니고, 특별할 게 없는데….”

박 PD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정말 모르셨어요? 섭외 잘 되지요, 우리 방송사 소속이시니까 출연료 저렴하지요, 말씀 잘하시지요.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솔직히 나는 서운했다. 나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박 PD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하 위원님은 너무 평범하세요. 근데 그게 장점입니다.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방송한다는 게 쉬운 일인지 아세요?”

해설도 그렇지만 방송 역시 손발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 누구와 방송하느냐, 누구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냐에 따라 좋은 프로그램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상벽씨나 송지헌씨와 호흡이 아주 잘 맞았던 것 같다.

나는 방송에는 자주 나갔지만 주연 노릇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개는 내가 주인공으로 초대된 자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은근히 수줍음이 많아 내게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냥 옆에서 툭툭 재미있는 농담을 양념처럼 던지는 게 적성에 맞았다. 또 그게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역할이었다.

방송에 자주 나간 뒤로 연예인 대접을 받게 되면서 나는 이따금 구설에도 올랐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십거리의 대상이 되고, 연예인들이 스캔들에 휘말리는 게 이해가 됐다.

한 번은 방송가 후배가 이런 말을 던졌다. “형, 30대 여자와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무슨 말이에요? 사실이에요?”

“엥? 너야말로 무슨 말이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후배는 한술 더 떴다. “형, 그 여자가 형이랑 함께 술 마시다 울기도 했다던데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상황, 이를테면 내가 젊은 여성과 이야기라도 나눴다면 백 번 양보해서 그런 루머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한 소설 앞에서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어떤 여성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나와 꽤 가까운 체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되레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나를 모르냐”고 따졌다. 기가 막혔다. TV에 얼굴을 비치고 신원이 노출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방송에 출연하고 나서 새삼 느끼게 된 게 있다. 방송이라는 곳 역시 치열한 프로들의 세계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 단순히 잘생기고 예쁘기만 해서는 버틸 수 없다.

‘얼굴’만 내세우는 연예인들은 잠깐 주목 받을 수는 있겠지만 곧 잊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유능한 연예인들은 방송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들을 돋보이게 비춰주는 스태프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수없이 방송에 나갔지만, 나갈 때마다 한 수 배웠다. 프로는 어디에나 있다. 경쟁도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살아남은 자, 견뎌낸 자의 웃음만 볼 뿐이다. 방송이나 연예계도 그라운드 못지않게 냉정하고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는 곳이다. 방송은 또 하나의 그라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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