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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루트 개척한 멕시코 마약왕 구스만… 美국경 넘는 마약 90% 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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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루트 개척한 멕시코 마약왕 구스만… 美국경 넘는 마약 90% 공급

입력
2015.08.0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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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때 가족부양 위해 발 들여, 배달사고 줄고 수익 늘며 고속승진

춘추전국시대 끝내고 왕좌에 "막대한 정치자금 대통령도 회유"

구스만이 2014년 2월 22일 첫 탈옥 후 체포돼 호송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구스만이 2014년 2월 22일 첫 탈옥 후 체포돼 호송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역사상 최대, 최악의 마약왕.”

멕시코의 거대 마약조직(카르텔)인 ‘시날로아’를 이끄는 호아킨 아르치발도 구스만 로에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전세계 마약거래에서 구스만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미국에 공급되는 마약의 약 90%가 구스만의 손을 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스만은 2009년 3월에는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갑부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당시 포브스는 “구스만은 매달 약 2,000만달러(약 226억원), 시날로아 카르텔은 매년 약 30억달러씩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7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돼 있던 구스만은 지난 7월11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인근 알티플라노 교도소에서 탈옥한 뒤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독방 샤워실 바닥에서 교도소 외곽의 한 건물까지 연결된 약 1.5㎞ 길이의 땅굴이 탈옥을 위해 건설된 게 알려지면서 미국 정부는 구스만의 탈출 배후가 멕시코 당국이라고 여기고 있다. 구스만이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으로 멕시코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미 전문가들은 탈옥한 구스만이 시날로아에 대한 재정비를 마친 뒤 전세계를 상대로 한 마약 거래를 다시 본격 재개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는 9ㆍ11테러를 일으킨 오사하 빈 라덴과 구스만을 세계 최악의 범죄인으로 지정한 바 있고, 마약과의 전쟁에 나선 미국 시카고 주정부는 2013년 1월 구스만을 ‘공공의 적 1호’로 지목했다. 전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구스만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

구스만의 어린 시절과 마약세계 진입

구스만은 1957년(FBI 추정 1954년) 멕시코 시날로아 주 바디라구아토의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멕시코 농가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아편을 재배하는 게 주요 수입원이었는데, 구스만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아편 재배를 도왔다. 학교는 집에서 100㎞나 떨어져 있어서 정규 교육을 받기는 불가능했다. 구스만의 아버지는 아편 판 돈을 술과 유흥으로 모두 탕진했기 때문에 구스만과 그의 여섯 동생들은 항상 굶주렸다고 한다. 결국 구스만은 아버지 대신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15세가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아편과 코카인, 마리화나 등을 파는 마약거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직장 사람들을 대상으로 코카인을 싸게 팔아 이윤을 남겼다. 그는 이때 ‘엘 차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키가 168㎝인 그를 빗댄 것으로 우리 식 비어 표현으로‘땅딸보’쯤 된다.

마약상에 발을 들여 놓은 구스만은 1980년대 멕시코 최대 마약조직인 ‘과달라하라’에 합류했다. 과달라하라 조직원이었던 삼촌을 따라 더 큰 돈을 벌려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 구스만이 맡은 일은 멕시코와 미국 국경까지 마약이 제대로 운반되는지 감시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살인과 돈이 비례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구스만은 마약이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이라도 늦게 운반되면 관련 조직원과 밀수업자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거래하기로 한 마약을 도중에 가로채거나, 약속을 깨고 가격을 더 높이 부르는 쪽에 팔아버리는 경우가 빈번했기에 구스만은 자신을 속일 경우 반드시 보복한다는 공식을 만들려고 했다. 잔인한 그의 행각이 악명을 떨치면서 그의 마약 점유율과 거래량은 급격히 올라갔다. 과달라하라 카르텔의 고위 간부들은 이러한 구스만의 사업 방식을 선호했다. 마약 배달사고가 줄어들었고 거래량도 증가하면서 수익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구스만은 당시 멕시코 마약계의 대부이자 과달라하라 카르텔의 수장인 미구엘 앙겔 펠릭스 갈라르도의 눈에 띄면서 고위 간부로 고속 승진한다. 그가 마약세계의 거두로 커가는 첫 발판을 얻은 셈이었다.

아렐리 고메스 멕시코 검찰총장이 지난달 13일 기자회견 중 구스만의 최근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탈옥한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에 대해 현상금 6천만 페소(약 43억3천만원)를 내걸었다. 연합뉴스
아렐리 고메스 멕시코 검찰총장이 지난달 13일 기자회견 중 구스만의 최근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탈옥한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에 대해 현상금 6천만 페소(약 43억3천만원)를 내걸었다. 연합뉴스

마약 중심지가 멕시코로, 구스만 또 한 번의 기회

구스만은 1980년대 중반 또 한 번의 중요한 기회를 맞게 된다. 당시 미국으로 공급되는 마약을 독점하던 나라는 콜롬비아였다. 콜롬비아의 마약왕인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미국 마피아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마약거래를 좌지우지 했다. 이에 미국은 콜롬비아와 미국의 주요 마약 루트인 카리브해를 전면 봉쇄했다. 콜롬비아 마약조직을 궤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에스코바르는 미국으로 향하는 대체 루트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커졌는데 그때 부각된 것이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미국과 약 3,000㎞이상 국경이 맞닿아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국경 감시도 허술했기 때문에 잘 만 이용한다면 카리브해 보다 더 많은 마약을 미국으로 밀수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구스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와 미국과의 마약 유통망을 개척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건축 전문가를 고용해 멕시코와 미국 국경지대에 수많은 땅굴을 팠다. 땅굴에는 철도와 조명, 환기구 등도 설치했다. 땅굴에 궤도를 설치하고 마약을 실어서 보냈다. 엄청난 양이 순식간에 미국으로 넘어갔다. 지난 10년간 멕시코와 미국의 마약범죄 수사당국이 국경지대에서 발견한 땅굴만 100여 개로 모두 구스만이 만든 것이었다. 또 미국 마약 당국의 허를 찌르기도 했다. 땅굴 방식과는 반대로 소량의 마약을 수많은 일반인들에게 나눠 소지하게 해 개미떼처럼 미국에 들여보내는 방법을 쓰기도 한 것이다. 구즈만은 이러한 방법으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단 3년 동안 코카인 약 4,765㎏, 대마초 2,085㎏ 등을 미국으로 밀수출했다.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이감방 샤워실과 연결된 약 1.7km 길이의 터널을 통해 탈주한 가운데 지난달 13일 탈옥 기사가 1면에 게재된 신문들. 연합뉴스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이감방 샤워실과 연결된 약 1.7km 길이의 터널을 통해 탈주한 가운데 지난달 13일 탈옥 기사가 1면에 게재된 신문들. 연합뉴스

구스만, 경쟁자들 물리치고 마약왕 등극

멕시코 마약계의 대부 역할을 하던 과달라하라 카르텔의 갈라르도가 1989년 검거됐다.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대부가 사라지자 멕시코 마약조직은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과달라하라 카르텔이 관리하던 주요 마약 루트들은 각 분파들의 소유물로 쪼개졌다. 구스만이 자신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새로운 대부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구스만은 태평양 연안 루트를 접수한 후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딴 시날로아 카르텔을 만들었다. 멕시코 북서부의 국경도시인 티후아나 루트는 아레야노 펠릭스 형제(티후아나 카르텔)에게, 북부 국경도시인 후아레스 루트는 카리요 푸엔테스 가문(후아레스 카르텔)에, 동북부 국경도시인 타마 울리파스는 후안 가르시아 아브레고(걸프 카르텔)에 돌아갔다. 모두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지점인 곳들이다.

하지만 각 카르텔들은 곧 치열한 영역확장 전쟁에 들어갔다. 멕시코 마약계를 차지하기 위한 전면전이었다. 가장 먼저 치열한 대결을 벌인 건 구스만의 시날로아와 아레야노 펠릭스 형제의 티후아나 카르텔 간이었다. 긴장이 고조되던 두 카르텔은 구스만이 1989년 중반 티후아나 측과 협상을 하려고 밀사로 보낸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부하인 아르만도 로페즈를 펠릭스 형제가 토막 살인해 거리에 버리면서 전쟁에 불이 붙었다. 구스만은 1992년 11월 멕시코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 과달라하라를 여행하다 펠릭스 형제가 보낸 조직원들의 총기 난사 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두 카르텔 간의 다툼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면서 승기가 시날로아로 기울었다. 구스만이 1993년 과달라하라 국제공항에 나타났다는 첩보에 티후아나 조직원 20여명이 중무장을 하고 공항을 급습했다. 이들은 구스만이 탄 것으로 추정되는 하얀색 고급 세단인 머큐리 그랜드 마퀴스에 총을 난사했는데 그 안에는 후안 제수스 포사다스 추기경이 타고 있었다. 다른 차를 오인한 것이었다. 추기경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면서 그 동안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오던 멕시코 정부가 군경을 동원해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구스만은 이 기회를 이용해 멕시코 연방검찰과 미 마약단속국(DEA)에 티후아나 카르텔에 대한 마약거래 정보는 물론 살인과 인신매매 증거 등을 흘려 티후아나 간부들이 줄줄이 검거되게 만들었다.

이어 구스만은 2000년대 초반부터는 막강한 경쟁자였던 후아레스 카르텔과 8년간 전쟁을 벌였다. 구스만은 후아레스 카르텔이 갖고 있던 수십억달러 가치의 마약 유통로를 독점하고 싶었다. 구스만은 무장 조직원들을 보내 2004년 9월 멕시코 서부의 도시인 쿨리아칸의 한 쇼핑몰에 들른 후아레스 카르텔의 수장인 로돌포 칼릴로 후안테스를 급습, 살해했다. 이후 두 카르텔 간 싸움이 격화하면서 양측 카르텔에서 약 5만명 넘게 사망했다. 카르텔 간의 무장 다툼으로 멕시코 정국이 불안해지자 2006년 12월 취임한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은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행동에 나섰다. 그런데 검거된 5만3,000명 중 시날로아 카르텔 조직원은 약 1,000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면서 사실상 칼데론 대통령이 시날로아 카르텔의 손을 들어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구스만이 막대한 정치자금 제공으로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자신의 편으로 회유했다는 것이었다.

멕시코 경찰에 체포된 마약 카르텔 조직원들이 손에 수갑을 찬 채 일렬로 서 있다. 이들 앞에는 검거 당시 압수된 로켓탄 발사기와 자동소총인 AK-47 등 중화기와 다량의 마약이 놓여 있다. 로이터통신
멕시코 경찰에 체포된 마약 카르텔 조직원들이 손에 수갑을 찬 채 일렬로 서 있다. 이들 앞에는 검거 당시 압수된 로켓탄 발사기와 자동소총인 AK-47 등 중화기와 다량의 마약이 놓여 있다. 로이터통신

구스만은 후아레스 카르텔까지 물리치면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된다. 멕시코와 미국 언론들은 “시날로아 카르텔은 이미 멕시코 연방정부와 군부에까지 침투해 있다”면서 “이를 이용해 다른 많은 카르텔들을 궤멸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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