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20년 정치역정에 오욕의 마침표를 찍었다. 산업화를 이뤘지만 민주화에 역행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정치에 입문한 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첫 여성대통령에 오르는 화려한 정치 행보를 보였지만, 임기 4년차에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결국 ‘첫 탄핵 대통령’이란 오명을 안으며 파국을 맞았다. 보수와 진보로 극명하게 갈린 18대 대선에서 승리해 보수 대통령으로 출발한 그의 시대는 끊임없는 불통과 편가르기의 리더십으로 논란을 빚다가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에게 돌이키기 힘든 분열과 상처를 남기고 막을 내리게 됐다. 18년간 장기집권 했던 부친이 비극적 최후로 그의 시대를 마감한 데 이은 것으로 2대에 걸친 파국인 셈이다.
34년만에 청와대 복귀했다가 4년 만에 쫓겨나
청와대는 박 전 대통령의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장소다. 대통령의 딸로서, 또 퍼스트 레이디로서 15년간 머물렀던 청와대에 그는 2012년 대선 승리로 34년만에 복귀했지만, 4년 만에 쫓겨나게 됐다.
1952년 대구 삼덕동에서 대령 박정희와 육영수의 1남2녀 중 첫딸로 태어난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것은 1964년이었다. 부친이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다. ‘영애’라는 호칭으로 청와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는 서강대 졸업 후 프랑스 그로노블로 유학을 떠나면서 청와대를 잠시 떠났다. 하지만 6개월 남짓의 프랑스 유학생활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중단됐다. 1974년 8ㆍ15 경축 행사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에 저격 당해 숨지면서 귀국한 박 전 대통령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뒤 1주일도 되지 않아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 당시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최태민과의 만남이 파국의 뿌리
이 무렵 그는 정체가 불분명한 최태민과 인연을 맺었다. 최태민은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에 주력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근혜양을 도와주라고 했다”는 편지를 쓰며 접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만남은 결국 박 전 대통령의 파국을 부른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씨앗이자 뿌리였다.
박 전 대통령은 육 여사 서거 때부터 1979년 10월 26일 부친이 서거하기 전까지 5년간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권력의 핵심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부친이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동행했고, ‘승용차 대화’나 ‘식탁 대화’를 통해 정치 수업을 받았다.
비극은 또 반복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27일 오전 1시 30분쯤 부친이 저격 당해 숨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시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스물 일곱 살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남들이 평생 울 만큼 눈물을 흘렸다”고 그 순간을 회고했다.
18년의 칩거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 지만과 함께 청와대에서 나와 서울 신당동 옛 집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 격하 운동이 벌어졌고 이후 6년간 아버지에 대해 공개적인 추도식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동생들과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웃음이 나온다”고 묘사한 18년 동안 아버지 재임 당시의 측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그의 가슴 속에는 ‘배신 트라우마’가 각인됐다. 그는 자신의 곁에 남은 ‘고마운 사람들’에 대해 “마음이 시류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고 진실한 태도로 일관된 사람들이다”라고 묘사했다.
이 시절 박 전 대통령이 좁은 집에서 은신만 했던 건 아니다. 1980년 영남대 이사장에, 1982년에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1988년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언론 인터뷰를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이때 다시 등장한 최태민의 전횡에서 촉발한 육영재단 분란으로 부친에 대한 추모사업조차 접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었다.
정치 입문 뒤 선거의 여왕으로 승승장구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캠프의 고문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1998년 4월 재ㆍ보선에서 아버지의 고향 대구 달성에 출마해 무난하게 당선됐다. 2000년 4ㆍ13 총선 이후에는 당 경선에 출마해 부총재로 뛰어 올랐다. 이때부터 박 전 대통령은 당내 비주류로 정치개혁과 정당개혁을 주장하며, 이회창 총재와 맞서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당권ㆍ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을 단행했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한나라당은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난파 위기를 맞았다. 그는 ‘보수정당 첫 여성 대표’로 선출돼 당을 천막당사로 옮기고 2004년 4ㆍ15 총선에서 전국을 도는 강행군으로 121석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후 2년 3개월 동안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면서 거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 단숨에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공주’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직전에는 서울 신촌에서 유세를 하던 중 피습을 당했다. 얼굴 오른쪽 11㎝의 긴 흉터도 그때 생겼다. 깨어난 후 직후 꺼낸 “대전은요?”라는 말 한마디가 선거 승리 요인이 됐다. ‘한마디 정치’의 시작이었다.
대권 도전과 실패, 그리고 재도전 성공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시 경선 과정에서 ‘최태민 스캔들’과 ‘최태민 일가 전횡’ 의혹이 제기됐지만 흐지부지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크게 흔들리자 또다시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그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고 외부에서 비대위원들을 영입해 당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이듬해 4ㆍ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이 승리로 ‘박근혜 대세론’을 확고히 굳힌 뒤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두 번째로 도전한 18대 대선에서 ‘국민대통합’과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내세우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파국
역사상 ‘첫 부녀 대통령’ 기록을 세우고 34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왔지만 국정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일성으로 시작한 국정은 인사 파동, 세월호 사고, 스스로 초래한 불통 논란 등으로 잦은 부침을 겪었다. 급기야 임기 4년 차인 2016년 12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직무가 정지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박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등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지만 탄핵 소추 의결 이후 92일 만에 ‘대통령직 파면’ 결정을 받았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지 18년 만에 측근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데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도 정계 입문 20년 만에 측근에서 촉발된 스캔들로 정치역정에 치욕적인 종지부를 찍게 됐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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