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소녀'와의 러브 스토리
"폴란드 유대인 수용소의 소년, 담장 너머 소녀 만나 희망 간직… 13년 후 미국에서 재회·결혼"
기적 같은 사랑, 거짓으로…
1992년부터 사연 공개 시작
2008년 학자들이 허위 밝혀
진실 고백과 비참한 말년
한 소녀가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소년에게 사과 한 개를 던져주었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년과 소녀의 그런 만남은, 간신히 눈빛이나 나눌 찰나 같은 시간이었지만, 죽음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무려 7개월간 이어졌다. 그리고 둘은, 소년이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면서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진다. 그리고 긴 세월 뒤, 둘은 운명처럼 만나게 되고, 서로가 그 때의 그(녀)임을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내내 해로했다는 이야기. 둘의 사연은 95년 신문에 보도됐고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두 차례나 출연, 세상을 감동으로 적셨다. 둘의 거짓말 같은 사랑이 정말 거짓말로 밝혀진 건 무려 13년이 지난 뒤였다.
그(들)의 거짓은, 남자가 훗날 고백했듯 별 악의 없이 시작됐을지 모른다. 실제 겪은 수용소의 참담한 기억 속에 작은 사랑 이야기 하나쯤 끼워 넣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남다른 수용소 체험담으로 주목 받으면 좋고, 돈을 벌 수 있으면 더 좋으리라 하는 생각.
하지만 사소한 욕망이 빚은 작은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자가 증식하는 기만의 기획 안에서 거대해진 욕망은 세상을 속이고 주인도 속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린 세상, 믿어버린 진실을 지키려는 세상의 욕망이 그의 삶을 기만 속에 가두는 또 다른 족쇄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거짓을 스스로 믿지 않으면 세상 속에 더는 머물 수 없는, 거짓의 노예로 변해갔을 것이다. 기만으로 스스로를 가둔 말년의 그의 세상은 유년의 부헨발트 죽음의 수용소보다 더 참혹했을지 모른다. 사소하고도 거대한 기만으로 세상과 자신을 속였던 헤르만 로젠블라트(Herman Rosenblat)가 2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로젠블라트는 1929년 9월 23일 폴란드 트리부날스키의 피오트르쿠프(Piotrkow)라는 마을의 한 유대인 상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는 그의 마을에 유대인 게토를 세운다. 그도 엄마와 세 형들과 함께 게토에 수용된다. 전쟁 직전 아버지는 발진티푸스로 숨졌다. 12살 되던 해 어머니는 독가스 시설을 갖춘 트레블링카(Treblinka) 수용소로 이감됐다. 여성과 노약자는 대부분 마이다네크(Majdanek)나 트레블링카의 가스실로 끌려갔고 노동력이 있는 이들만 살아남았는데, 키가 컸던 로젠블라트는 형들의 조언에 따라 나이를 17살이라 속였다고 훗날 자서전에 썼다. 그와 형제들은 1944년 7월 쉴리벤(schlieben) 인근의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감돼 45년 2월까지 강제노동에 동원됐고,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캠프로 옮겨진 뒤 종전을 맞이했다.
그가 ‘천사 소녀’를 만났다고 한 것은 부헨발트에 수용됐던 약 7개월 동안이었다. 시신을 소각로로 옮기는 노역을 끝낸 어느 날, 잠깐의 휴식시간 동안 철조망 주변을 산책하던 그는 담장 너머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을 바라보던 한 소녀를 보게 된다. 소녀는 모직 재킷 속에서 사과를 꺼내 울타리 너머의 그에게 던져준다. 소녀는 이따금 빵이나 과일 등 먹을 거리를 챙겨오곤 했고, 소년은 소녀와의 만남을 희망처럼 간직하며 살아남는다. 두 살 아래로 역시 유대인이었던 소녀는 가족과 함께 신분을 감춘 채 쉴리벤 인근의 한 가톨릭 시설에 머물렀다고 로젠블라트는 여러 차례 말했고, 그렇게 썼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도 오래 머뭇거리지도 못했다. 붙잡히면 둘 다 죽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친절한 농가의 소녀라는 것과 폴란드어를 이해한다는 것 외엔. 이름이 뭔지, 왜 나를 도와주는 지도. 소녀는 나의 희망이었다.” 동화 의 일부. .
종전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한 유대인 자선단체의 주선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4년간 머물며 재활기술학교에서 전기 기술을 익힌다. 그는 50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미 육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53년 뉴욕 브루클린에 가전제품 수리점을 연다. 57년 친구의 주선으로 코니아일랜드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바로 13년 전 자신의 희망이던 쉴리벤의 소녀임을 알게 됐고, 즉석에서 청혼했다고 한다. 이듬해 결혼한 둘은 60년과 62년 아들과 딸을 낳고 지금껏 살아 왔다.
그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주변에 공개하기 시작한 건 92년 말부터였다. 그해 로젠블라트의 가게에 무장강도가 들어 그와 아들 켄을 총으로 쏜다. 그 일로 당시 32살이던 켄은 장애인이 되고 로젠블라트 역시 입원을 했다. 그는 97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서 “입원해 있던 어느 날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나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 그는 누구에게도 부부의 극적인 인연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참혹했던 수용소 시절 기억을 모두 잊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로젠블라트는 95년 말 ‘뉴욕포스트’의 사랑 이야기 콘테스트에 저 사연을 응모, 당선된다. 그의 사연은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 몇몇 신문에 소개됐다. 그 무렵 로젠블라트를 인터뷰했던 마이애미 헤럴드의 한 기자(Diana Moskovitz)는 그의 사연이 거짓으로 판명된 직후인 2009년 가디언지 기자를 만나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의 사연이 눈덩이처럼 커져 통제하기 힘들어진 게 조금 불편한 듯한, 상냥하고 순진한 노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어요. 모두가 정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더라도 그냥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이요.”
96년 로젠블라트는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 제의를 두 차례나 사양한다. 하지만 윈프리가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하자 마지못해 응한다. 쇼 출연으로 그의 사연은 미국 전역은 물론 외신을 타고 세계로 전파됐다. 펭귄 출판그룹의 자회사인 버클리 북스는 자서전 출판계약을 맺었고, 영화사인 애틀랜틱 오버시스 픽쳐스는 판권을 사들인다. 그는 이런저런 강연과 유대인 교육행사 등에 초빙돼 연설하기도 했다.
로젠블라트는 자신의 결혼 50주년이던 2007년에도 윈프리 쇼에 출연, J.C 페니에서 산 반지를 아내 로마 래지스키 로젠블라트(Roma Radzicki Rosenblat)에게 끼워주며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했고, 윈프리는 “22년 방송 경험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며 그들의 사연을 띄웠다.
물론 의문을 품은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당장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과, 그의 형제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함구했다. 당시의 수용소 상황을 보자면 믿기지 않는 일이라는 요지의 인터넷 글들도 간혹 있었지만, 대놓고 어깃장을 놓아 감동에 젖은 세상에 찬물을 끼얹을 정도는 아니었다. 홀로코스트 사학자인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tadtㆍ68)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것도 2007년 12월에 가서였다. 대만에 살던 한 유대계 미국인 대니 블룸(danny Bloom)도 로젠블라트의 진실을 규명해달라며 몇몇 학자들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그 중 한 명이 미시간주립대의 홀로코스트 학자 켄 왈츠(Ken Waltzerㆍ73)였다. 부헨발트 수용소 아이들에 대한 책을 준비하면서 생존자 인터뷰를 진행하던 왈츠는 부헨발트 수용소의 철조망, 외곽 도로 등 구조를 두고 보건대 로젠블라트와 소녀가 지속적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도로는 독일군이 완전 봉쇄한 상태였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은 24시간 감시체제였다. 또 당시 로마는 쉴리벤에서 340km나 떨어진 쉴레지아 브레슬라우의 한 마을(현 브로츨라프 브제크시)에 살았던 것으로 행적 조사 결과 밝혀졌다.
2008년 12월 25일, 켄 왈츠를 비롯한 몇몇 홀로코스트 학자들이 ‘The New Republic’에 저 사실을 집중적으로 밝히며 의문을 제기한다. 45년 5월 10일 오전 10시에 가스실로 보내질 운명이었는데 불과 두 시간 전에 연합군이 진주하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로젠블라트의 자서전 원고 내용도 허위로 밝혀졌다. 독일의 항복과 종전은 45년 5월 8일에 공식적으로 이뤄졌고, 강제수용소의 관리는 5월 초부터 사실상 국제적십자사에 이관됐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며 사전에 고지한 예가 없었다는 점도 생존자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로젠블라트는 이틀 뒤인 27일, 마침내 진실을 고백한다. 그는 “로마와의 인연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지만 홀로코스트 체험 등 나머지는 모두 완벽한 진실”이라며 “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인내를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밝혔다. ‘굿모닝 아메리카’와의 인터뷰에서는 “그것(로마와의 인연)은 거짓이 아니라 나의 상상이었다. 그리고 나의 상상 안에서 내 마음 안에서 그것은 진실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녀가 거기 있었고, 내게 사과를 던져줬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거짓을 저렇게 해명(?)했을 뿐,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켄 왈츠는 “홀로코스트에 구원의 결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두운 진실을 달콤한 사랑이야기에 감추고 마치 그곳을 정연하고 정의로운 곳인 양 그리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다른 생존자들의 진정한 기억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고,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가디언, 2009.2.15)
출판사는 판권 계약을 해지하고 계약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진실이 밝혀지기 직전인 2008년 8월 출간된 아동용 도서 역시 회수해 폐기했고, 이미 팔려나간 2,000여 권도 환불조치했다. 하지만 영화사는 제작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처음부터 그의 회고록에 허구적 내용을 대폭 가미할 계획이었고, 드러난 진실 위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심리를 탐구하겠다는 거였다. 영화사측은 로젠블라트에게 영화 판권 수입 전액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 당했다고 2009년 1월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세상은 로젠블라트를 비난했다. 그것은 그의 사연에 감동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엄청난 수모를 겪으며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사실 그 전부터 둘째 형 샘은 2007년 작고할 때까지 동생과 관계를 끊고 지냈고, 자녀들도 아버지를 회유하며 대외 활동을 만류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숨질 때까지 마이애미 북부의 한 쇠락한 아파트에서 아내 로마와 칩거했다.
왈츠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조금만 조사하면 드러날 거짓이 무려 13년 동안 통용된 이 사회의 허술함, 특히 문화 관련업계를(culture makers)을 비판했다. 출판사도, 오프라 윈프리도 진실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왈츠의 동료 학자인 피츠패트릭은 “출판업자나 영화업자가 거액을 투자해 이야기를 사들이기 전에 몇 천 달러만 들여 사실 확인을 의뢰했더라면 그의 거짓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스턴대학 매거진 ‘보스토니아(09년 여름호)’인터뷰에서 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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