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성애 논란 부른 화보 모델들
만화 속 관습적 코드 옮긴 것 뿐
인간의 성장과 변화, 쇠퇴는 외면
무생물의 아름다움 모방에 그쳐
‘마침내 로타가 이곳까지 왔구나.’ 얼마 전 함영준 큐레이터가 한국일보에 쓴 ‘순수하다고? 수상하다고!’(본보 9월 1일자 23면)를 읽은 후에 든 생각이었다. 몇 년 전 로타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들이 언젠가 일간지 지면에 등장한다거나, 심지어 동시대의 주목받는 현대미술 큐레이터가 비판적으로 다루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몸을 찍고 싶은 욕망과 찍히고 싶은 욕망이 흘러 다니다 교합해서 태어난 수많은 아마추어 사진 중 하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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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 ‘설마’했던 것을 ‘실제’로 했을 뿐
사진가로서 로타가 지닌 강점은 ‘설마 이런 걸 할까’ 하는 바로 그걸 ‘실제로 한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함영준이 지적했듯 그는 일본 그라비아 사진집과 애니메이션의 성적 코드를 사용하거나, ‘소녀’를 향한 관음증을 드러내는 민망한 일을 기꺼이 한다. 그런 로타의 사진은 혐오와 매혹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로타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그의 사진은 ‘로리타 콤플렉스’나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드러내는 변태적인 이미지이며, 그것이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입에 오르내리고 인기를 끄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남성중심주의가 빚어내는 메스꺼운 풍경이다. 반면 로타의 사진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는 별 달리 큰 노출도 없는 아름다운 사진에 쏟아지는 격렬한 비난과 모욕은 곧 우리 사회의 경직성과 과도한 도덕주의의 숨막히는 단면일 테다.
그러나 서로를 향해 휘두르는 칼날들은 어째 잘 부딪치지 않고 헛도는 듯하다. 로타의 사진은 분명 남성들의 뱃속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쾌감을 제공한다. 또한 누구든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사진을 비판할 권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판의 선을 넘어 로타의 사진을 잠재적 범죄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성적 쾌감을 자극하는 이미지가 실제 범죄를 일으킨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자칫 검열에 대한 사회적 근거로 악용되기도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왜곡된 성 관념을 반성하자? 공허하다
격렬한 논쟁에 반해서 로타의 작업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여전히 부족하다. 예를 들어 그의 사진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적 관념의 결과물이니, 사회적인 반성과 올바른 성적 이해를 정립하자는 식의 말은 정확하다 해도 공허하다. 사진이 항상 일방적으로 사회를 반영하기만 한다면 더 나은 사진을 위한 노력은 무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로타의 민망한 사진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사실 로타의 사진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꽤 뻔한 악취미다. 우리는 일본 여고생들이 입는(다고 상상되는) 체육복을 어디선가 구해서 스튜디오에 두고 ‘성인’ 여성들에게 건네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로타의 사진 속 여성 모델의 표정과 자세는 경이로울 정도로 단조롭다. 한결같이 멍한 눈빛을 하고 가슴과 엉덩이의 굴곡을 아크로바틱하게 강조한다. 그런 여성들의 육체는 마치 종이로 오려낸 인형처럼 평면적이다. 당대의 시각문화적 지형에 대한 감각이나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길러내지 못한 이가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의심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했을 때, 그럼에도 많은 작업량과 적지 않은 촬영을 통해 톤과 빛, 모델을 통제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을 때 흔히 탄생하는 사진들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로타의 텍스트
사실 로타의 우스꽝스러운 취향은 사진에서보다도, 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다는 그의 사진집에 삽입된 조악한 텍스트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소녀는 창가의 봄 햇살을 맞으며 자는 낮잠을 좋아한다”, “소녀의 살갗은 우유처럼 하얗고 순수하다”는 문장들의 촌스러움은 견디기 어렵다. 이는 그가 ‘소녀’라는 안전하고 말랑말랑한 단어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카메라 앞에 있는 몸이 겪었던 시간과, 그것이 지닌 인격의 다양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로타의 사진이 모델들을 성적 대상화하므로 비윤리적인 사진이라는 식의 명쾌한 논리에 좀처럼 동의하지는 못한다. 또한 그의 사진을 보면 나 역시 속이 스멀스멀 간지러워진다는 사실 역시 고백해야겠다. 사실 사진의 역사 자체가 타인의 육체를 찍은 이미지를 가지려는 욕망으로 얼룩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욕망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인간들은 최초로 카메라를 가지게 되자마자 허겁지겁 누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곧 포르노그래피 산업이 생겨났고, 19세기의 파리와 런던은 유럽 전역과 신대륙까지 포르노 사진을 공급하는 허브가 되었다.
이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은 왜 다른 이의 육체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최소한 사진 속의 이성과 섹스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육체들을 왜 욕망하고 왜 매혹되는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사진의 역사에서 그 이상한 욕망과 매혹은 절대 식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욕망은 때로 예술 제도 안으로 숨어들어갔고, 때로는 핀업 사진이 되어 잡화점에서 팔려나갔다. 에로티시즘은 여러 장르의 사진이 사용하는 중요한 연료였다.
에로티시즘은 즐거운 일이다
문제는 작업에 어떤 에로틱한 시각적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외과 수술을 하듯이 그런 욕망을 사진으로부터 잘라내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기와 음모를 그대로 노출한 사진들 중에도 예술의 어떤 윤리적 최전선에 도달한 것들이 있다. 몸을 찍는 예술가들은 대개 자기 욕망의 추한 모습을 직시하며 그것이 풍기는 악취와 지린내를 드러낸다. ‘소녀’나 ‘순수’와 같은 따뜻하고 안전한 단어 뒤에 숨는 사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예술 사진과 로타의 사진은 전혀 다른 곳에서 유통된다. 미술관이 욕망을 해부하는 곳이라면, 상업사진 스튜디오는 욕망을 아름다움이나 우아함과 같은 다른 형태의 이미지로 변환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로타의 욕망이 ‘소녀’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는 작업 방식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단지 우리는 어떤 악취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는 있다. 페미니즘 이론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에로티시즘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 즐거운 일이라고 썼다. 우리는 ‘보그’ 표지 얼굴의 아름다움을 단호하게 부정할 정도로 경건해질 필요는 없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 얼굴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아름다운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장과 변화와 쇠퇴를 허용하는가? 긍정적인 감정 뿐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도 표현하는가? 인위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허물어지는가? 혹은 금속이 되려고 하는 나무처럼 무생물적 대상의 다른 아름다움 자체까지 거짓으로 모방하는가?
새겨들을만한 지적이다. 로타가 찍은 사진 속 육체들은 무생물을 닮았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만화를 실사로 재현하는 것이 자신의 로망”이라고 말했다. ‘소녀’의 흉내를 내는 사진 속 성인 여성들의 멍한 표정과 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육체는 무생물인 만화 주인공들의 관습적 코드다 아마 그를 둘러싼 소아성애 논란을 로타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소녀’는 웃고 학교에 가고 분식집을 오가는 진짜 소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이어스톤의 질문은 로타에게도 던져진다. 당신의 사진 속 여성들은 조금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아름다울 수는 없는가. 인간은 서로 다르게 생긴 개체다, ‘소녀’나 ‘순수’ 같은 단어로 규정하기에는 복잡하다. 주름과 흉터, 군살이 있다. 그런 흔적을 지닌 채로 당신의 카메라 속에서 아름답고 섹시해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당신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생물의 ‘소녀’가 아니라 나이를 먹어가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격할 수는 없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진들에까지 확장된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기 원하는 신체의 아름다움은 과연 인간의 것인가? 사실 로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진 속 신체는 어딘가 증강되어 있다. 여성의 눈과 가슴은 언제나 더 크고, 코는 더 오똑하다. 허리는 잘록하고 다리는 길다. 피부는 매끄럽고 탄력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젊다. 무생물에 가까운 육체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거친 피부와 펑퍼짐한 몸매를 가져도 된다고, 그리고 그 상태로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을 사진을 통해 찾아보자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명체인 당신의 아름다움이 무생물처럼 완전할 필요는 없다고, 영원히 젊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김현호 사진비평가
공동기획: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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