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은 내년부터 들면 되죠.”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PD라는 직업을 원했던 이한빛(사망 당시 27세) PD는 비정규직이던 CJ E&M 인턴 시절 첫 월급 180만원 중 60만원을 세월호 416연대와 해고된 KTX 비정규직 승무원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적금을 들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첫 1년은 기부하고 싶다며 빈곤사회연대 등 다양한 시민단체를 후원했다. 마침내 정규직 조연출이 됐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그가 꿈꾸던 것과 너무 달랐다. 처음으로 제작에 참여한 tvN 드라마 ‘혼술남녀’ 촬영 기간 그가 55일 중 단 이틀만 쉬는 강행군을 한 건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작 현장의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강요해야 하는 죄책감은 너무 버거운 현실이었다. 결국 종방연 이튿날(지난해 10월 26일)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현실은 냉랭했다. 지난 18일 이 PD 사망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책위의 기자회견 후, 수 차례 시도에도 연락이 닿지 않던 CJ E&M측은 저녁 늦게야 언론에 입장 자료를 배포했다. 사망 후 6개월간 침묵 후 첫 입장 발표였다. 수 백 건의 관련 기사가 쏟아지고, 주요 포털사이트에 ‘혼술남녀‘가 검색어 1위에 오르며 사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뒤였다. 그러나 해당 자료는 CJ E&MㆍtvNㆍ혼술남녀 홈페이지 어디에도 게재되지 않았다. 유가족과 대책위도 기사를 통해서야 CJ의 입장을 접했을 뿐이었다.
내용에서도 진정성은 찾기 힘들었다. CJ E&M 측은 ‘경찰과 공적인 관련 기관 등이 조사에 나선다면’이라는 조건을 단 뒤 ‘수사 결과를 수용하고 개선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대책위 관계자는 “이 PD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동안 CJ E&M 측의 조사 방식은 의뭉스러웠다. 대책위의 공동조사 제안을 번번이 거부했고, 조사 대상은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선임 PD 위주였다. 그렇게 내놓은 이들의 결론은 “이 PD가 지각을 하는 등 평소 태도가 불량했다”는 것이었다. 이 PD가 과도한 노동과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진술은 CJ E&M의 관심 밖이었다.
지난해 ‘혼술남녀’는 노량진 공시생들과 신입 강사 등 청춘들의 애환을 ‘혼술(혼자 술마시기)’이라는 주제로 풀며 인기를 끌었고 현재는 시즌2 제작에 한창이다. 그러나 정작 ‘혼술남녀’가 위로해야 할, 가장 가까이 있던 한 고달픈 청춘의 호소는 묵살됐다. 그들이 정말 이 땅의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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