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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입력
2017.05.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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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5.9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이 1951년 사임했다. 그의 사퇴는 대통령 이승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항변이었지만, 이승만은 제 갈 길을 갔다.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이 1951년 사임했다. 그의 사퇴는 대통령 이승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항변이었지만, 이승만은 제 갈 길을 갔다.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9일 초대 부통령 이시영(1869~1953)이 사임했다. 앞서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전달한 ‘국민에게 고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대통령 보좌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진의는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었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실추하며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으니,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선량(選良ㆍ국회의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ㆍ공직자의 도리)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ㆍ규탄하되, 모든 부정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직접적 계기는 국민방위군 사건이었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시작된 1ㆍ4 후퇴 국면에 제2국민병으로 다급하게 편성된 50만 명의‘국민방위군’중 약 9만여 명이 퇴각 과정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추위에 얼어 죽은 사건. 고급 장교들이 군자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하는 바람에 식량과 옷을 지급받지 못해 빚어진 일이었다. 국회 조사위원회는 그 해 12월부터 약 넉 달 간 조사를 벌여 방위군 간부들이 착복한 돈만 23억원(圓)이고, 쌀은 5만2,000석에 달한다고 밝혔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이승만이 총재로 있던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이었고, 장교 대부분이 대한청년단 간부였다.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모르겠다”는 이시영의 비수 같은 말은 당연히 이승만을 겨냥한 거였다. 그의 사퇴 후, 이승만이 진상조사 책임을 맡긴 건 국방부장관 이기붕이었다.

조선 명문가의 7형제 중 5남으로 태어난 이시영은 16세 진사과, 22세 문과에 급제해 고종의 관료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부승지 등을 지냈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이던 그는 외부대신 박제순의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하며 직을 사임했고, 가산을 정리한 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대한독립당과 임시정부에서 내내 활동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옥사한 이회영을 비롯, 형제 전원을 중국에서 잃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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