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개ㆍ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꽤 높은 자리에 계신 나으리께서 만취와 과로 때문에 한 실언이라고 한다. 그가 신문 기자와 나눈 대화를 쭉 보면 이 발언은 영화 ‘내부자들’을 인용한 게 분명해 보인다. 딱히 민중이 개ㆍ돼지라는 게 아니라, 자기 말 못 알아듣는 기자에게 알아듣게 설명하느라 인용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교육부 고위공무원을 오래 하시다 보니 술자리에서도 교육적인 방법을 동원하다 나온 실수인데, 하필 그 상대방이 중앙일간지 가운데 가장 친 민중적 입장에 서 있는 ‘경향신문’ 기자여서 사달이 났다.
나으리께서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었을지는 쉽게 짐작이 된다. 아마 지금까지는 상대방들이 맞장구쳤을 것이다. 그분들은 자신이 민중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나으리도 실제 민중을 만날 수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개ㆍ돼지와 술자리를 할 수도 있다. 이걸 깨닫지 못한 게 그의 실수다. 그래, 실수다. 실수. 술자리 실수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말자. 취하면 개가 되는 사람 어디 한두 번 보는가.
“개ㆍ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기자도 참 답답했다. 민중을 개ㆍ돼지 취급하면 된다는 말이 뭐가 어렵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며 물었다. 그러자 나으리가 이렇게 대답한 거다. ‘아니 배운 사람이 그것도 못 알아들어…’라는 심정에 짜증스럽게 하신 말씀일 거다. 그런데 이 장면은 교육부 고위공무원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 학습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 질문하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대답하고 더 깊은 질문을 유도해야 한다. 설사 그 질문이 어처구니없다고 하더라도 질문자를 격려함으로써 학습 욕구를 높이는 게 교사의 역할인데 평소에 그것을 강조하셨을 교육부 나으리께서 이러시면 안 된다. 이 점은 우리가 살짝 책망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시라.
질문을 대하는 자세와는 별개로 과학적인 지식에도 약간 문제가 있다. 세상에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되는 동물은 없다. 뱀, 이구아나, 거북 같은 파충류를 키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다. 애완동물이랍시고 좁은 플라스틱 상자에서 평생을 키운다. 파충류의 뇌는 숨 쉬고 먹고 생식하는 기능밖에 없는 줄 아는 거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면 그들이 왜 밀림을 누비며 다니겠는가.
그리고 개와 돼지가 아무리 같은 포유류에 속한다고 해서 개ㆍ돼지로 묶어서 취급하면 안 된다. 개와 돼지는 모두 가축이지만 개와 돼지는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돼지는 7,000~9,000년 전에 산 채로 잡혀서 인간 세상에 들어왔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돼지는 인간의 포로다. 하지만 개는 1만~4만 년 전에 자신의 의지로 인간을 동반자로 선택하여 인간 사회에 합류했다. 자연에 살던 늑대가 인간 사회에 와서 개가 되었다. 사람이 개를 사로잡은 게 아니라 개가 인간을 선택한 것이다.
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짖으며 뛰놀았다. 늑대 시절과는 달리 힘겹고 목숨을 건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놀기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대신 인간이 개를 위해 사냥을 했다. 가끔 인간들이 사냥할 때 옆에서 재미 삼아 거들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의 기쁨을 차지하기도 했다.
민중을 개ㆍ돼지로 여기는 자들은 ‘개는 돌봐주는 사람을 주인이라 여겨 충성을 바친다’는 얼토당토아니한 착각을 한다. 개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충성스런 보살핌에 걸맞는 보상을 하는 것뿐이다. 스스로 주인이라 착각하는 사람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개는 그 사람을 무리의 아랫것으로 간주한다. 개의 충성심은 특정인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리에 대한 충실함에 가깝다. 잊지 마시라. 개는 늑대에서 왔고 여전히 늑대와 교미가 가능하다.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게 자기 자식 일처럼 생각이 되나?”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가슴 아프지도 않은가, 사회가 안 변하면 내 자식도 그럴 수 있다. 그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봐라, 라는 기자의 말에 하신 말씀이다. 술자리에서 10분만 이야기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취한 사람은 교육부 나으리가 아니라 ‘경향신문’ 기자인지도 모르겠다. 딱 보면 모르는가. ‘아, 이 사람은 공감능력이 없구나. 어쩌면 뇌의 전두엽 부분에 심각한 장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을 굳이 물어서 이런 말까지 끄집어내고 말았다.
기사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런 정도로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교사나 목사, 스님 같은 것은 되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을 양성하는 기관에서 일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이 분은 비난을 받을 게 아니라 당분간 치료와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복지체계 안에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아이고… 출발 선상이 다른데 그게 어떻게 같아지나. 현실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다. 현실은 출발선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18년 동안이나 활동한 ‘학벌없는 사회’가 올해 4월 스스로 해산하고 말았겠는가. 이젠 학벌마저 더 이상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가 아니다. 공무원이 왜 존재하는가. 그 다른 출발선을 평등하고 정의롭게 조정하라고, 다른 출발선에 시작했더라도 과정과 결과가 공정하게 나오게 하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걸 그대로 두자고 하면 당신 말대로 개ㆍ돼지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으로 일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향욱 정책기획관과 같은 생각하는 분들 꽤 계실 거다. 잘 기억하시라. 민중에는 돼지도 있지만 개도 있다. 다시 말하건대 개가 인간을 선택했다. 자기 대신 사냥하고 지키라고 선택한 것이다. 말 안 들으면 문다. 개 안에 늑대 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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