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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 때문에… 충성심에… 거짓말 넘치는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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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 때문에… 충성심에… 거짓말 넘치는 법정

입력
2015.11.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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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 중요시하는 풍토 탓

죄의식 없이 허위진술 술술

변호사 코치로 모의 연습까지

벌금·불구속 수사 등 처벌 물렁

차후에 덕 볼까 막연히 기대도

위증을 처세술로 인식 전과자 양산

“맥주병 던지는 거 못 봤다니까요.” “저도요.” “마찬가지예요.”

지인이 맥주병을 던져 피해자를 다치게 한 사건에 증인으로 출석한 세 사람은 법정에서 한결같이 목격 사실을 부인했다. 피해자가 상해를 입었다는데도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은 지인이 맥주병을 던진 것은 물론 깨진 병 조각도 보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진술과 병 조각 사진, 현장검증 등을 통해 세 사람의 증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인지상정으로 지인을 돕겠다는 마음에 거짓 진술을 했지만 세 사람에게 남은 건 위증사범이란 꼬리표였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한다’는 증인의 법정 선서는 빈말이 되기 일쑤다. 지난해 위증사범은 1,800명에 달해 최근 4년 동안 가장 많았다. 어쩌다가 신성한 법정이 거짓말 놀이터로 변해 버린 걸까.

●죄의식보다 인정이 먼저

인적 네트워크를 큰 자산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거짓말은 심각한 비난 대상이 아니다. 거짓말에 대한 죄의식보다 온정주의 정서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위증이 자신을 옥죄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해보기 전까지 진지한 고민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정(情)에 이끌린 법정 거짓말은 한국 사회에서 대수롭지 않게 표출된다. 2012년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던 30대 남성 두 명은 잠적한 공범 A씨를 주범이라고 ‘사실대로’ 진술했다. 그러나 3년 후 막상 A씨가 검거되자 그의 처벌을 면하게 할 생각에 “예전에 거짓말을 했다. 주범은 A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둘러댔다. 결국 두 사람은 그릇된 판단 탓에 위증 혐의로 구속됐다.

최근에는 위증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주점에서 업주를 때려 재판을 받게 되자 오히려 자신이 업주에게 맞았다며 현장에 있던 일행 3명에게 위증을 교사한 남성이 있었다. 심지어 현장에 없었던 친구에게 싸움 장면을 목격했다고 위증을 부탁하기도 했다. 증인들은 법정에서 지인과 친구의 바람대로 허위진술을 했지만, 통화내역과 문자메시지, 참고인진술, CCTV 분석 등을 통해 거짓이 드러났다. 친구를 도우려고 했을 뿐이라며 뒤늦게 선처를 호소했지만 후회막급한 상황이 연출됐다. 전과자가 된 것이다.

지인을 돕겠다는 마음이 앞서 죄를 뒤집어 씌우는 시도도 있었다. B씨는 지구대에서 난동을 부린 지인의 재판에 출석해 “경찰관들이 순찰차에 타지 않으려는 지인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위증죄로 기소됐다.

●상하관계나 충성심도 영향

특히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충성심이 강한 집단에선 위증 유혹에 빠지기 쉽다. 쇼핑몰 대표인 50대 사업가는 용역을 고용해 반대파 주주가 소집한 임시주주총회를 방해하다가 기소되자, 경비원에게 “허위 증언을 해 주면 체불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교사했다가 적발됐다. 대기업 회장이 재판을 받게 되면 종종 집단적 거짓말로 이어진다. C그룹의 경우 회장이 횡령 등 혐의로 연루되자 대책회의를 열어 입을 맞추고, 변호사 코치로 법정 상황을 가정해 모의연습까지 했다. 참다 못한 재판장이 변호인에게 “증인들에게 위증교사를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유사수신업체 회장인 D씨는 최근 2년간의 재판에서 줄곧 혐의를 부인했는데 증인 19명이 D씨가 회사 대표가 아니라고 입을 맞췄던 영향이 컸다. 하지만 D씨가 측근을 시켜 증인들에게 거짓진술을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 이들 모두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조직폭력배들은 두목과 조직 보호를 목표로 막무가내로 허위진술을 일삼는다. 대구의 폭력배 E씨는 여자친구의 의류판매 독점권을 보장하려고 후배 조직원 3명을 시켜 경쟁업체 영업을 방해했다가 기소됐다. 후배 조직원들은 법정에서 “형님에게서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며 충성심을 보였지만 헛수고였다.

최근에는 검사가 직접 재판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허점을 노려 국가소송에서 위증이 난무하고 있다. 지난해 6월 한 제약회사는 국세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영업비 대부분을 의사에게 지급했으면서도 세금 감면을 목적으로 도매상에 준다고 거짓말을 했다. 검찰 관계자는 “민원인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공무원 입장에선 위증을 적발하고도 책임감을 갖고 고발하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검사가 참여하는 형사소송보다는 당사자끼리 다투는 민사소송에선 위증비율이 훨씬 높다. 소송 당사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직접 신청해서 데려오기 때문이다.

●위험부담보다 이득 커

우리나라에서 위증이 횡행하게 된 데는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다. 대부분 벌금이나 불구속수사에 그쳐 위증이 엄중한 범죄가 아니라는 인식도 한몫 한다. 위증을 하는 이들이 위험부담보다 장래 얻게 될 이득이 클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갖는 것도 유혹 요인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얽히고 설킨 네트워크 사회라 순전히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독립적으로 진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어렸을 때부터 준법교육을 철저히 받지 않은 영향도 크다"고 진단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위증을 처세술이나 세상 살아가는 방법, 문제해결 요령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식이 별로 없다”고 분석했다. 양부남 수원지검 1차장검사는 “계약서 작성이나 서류 보존 등 중요자료를 문서로 남겨 놓는 문화가 정착되면 위증 범죄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ankookilbo.com

●본문 아래 링크에서 또 다른 법정 범죄 ‘무고죄’ 기사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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