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기계는 인간 육체의 연장이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간 두뇌의 연장이 시작되었고, 공상과학(SF)의 상상력에서 인공지능(AI)이라는 실질적 연구 분야가 생겨났다. 이세돌의 패배에 충격을 토로하기 전에 인공지능이란 의미부터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는 새로운 AI 기술이 아니라, 빅데이터를 이용한 버전업, 돌연변이가 아닌 AI의 진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밥솥이나 냉장고에 사용하고 있는 유비쿼터스의 자동제어장치는 단순한 AI의 단계로 인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걸 AI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사람과 사람의 대결을 사람과 기계의 대결처럼 보이게 하는 이벤트일 뿐이다.
사람이 숨어있는 체스 기계
흥미롭게도 이 같은 시도는 약 250년 전부터 있었다. 1770년, 체스 자동장치 ‘더 투르크(The Turk)’가 발명됐다는 소식이 유럽을 강타한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에 여제까지 뜨거운 관심을 보일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놀라운 실력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벤자민 프랭클린까지 꺾어버린 이 체스 기계는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며 큰 돈을 벌었다. 사람들이 놀라움과 공포를 느낀 기계의 지능이 실은 거울의 반사기능을 이용한 체스 마스터들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사기행각임이 드러나 불태워지기까지 무려 84년이나 걸렸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알파고의 뒤에도 역시 프로그래머라는 인간이 있다. 지금까지 바둑을 두었던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컴퓨터에 모아놓고 이세돌 9단과 대국을 시킨 것이다. 열 사람이 모이면 천재 하나를 이기는 인간의 집단지성을 보여준 예이다. 암산왕이 컴퓨터와의 계산시합에서 졌다고 해서 인간의 지능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계산기에 진 것이 아니라 계산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세돌을 인간의 대표로 보고 승패에만 집착하는 것은 대중적 흥미에는 부합할지 몰라도 고도의 지적 게임을 하는 학문 분야마저 이런 포퓰리즘에 끌려가면 정말 ‘인간의 지능’을 앞선 ’인공지능’에 지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이제껏 인공지능이라고 해온 것은 손글씨도 제대로 못 읽어 엉뚱하게 텍스트 변환을 하거나 유전자를 ‘유전 아들’로 번역하는 등 아주 우스운 수준이었다. 알파고를 만든 구글도 얼굴 인식을 제대로 못해 흑인을 고릴라로 식별하고 사과하는 소동을 벌이지 않았던가. 알파고와 같은 지금의 AI는 학습시킨 그 한 가지만 가능하지만 생명체의 인텔리전스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학습시킨 한 가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스스로 학습할 수 있을 때 AI가 인간지능을 앞서게 된다. 아직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며, 이세돌과 하사비스의 싸움이다. 동양의 아날로그 직관과 서양의 디지털 분석력과의 싸움이다.
인공지능의 지배, 특이점에 왔다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생명공학(BT), 정보기술(IT), 나노기술(NT) 이 세 가지가 결합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동안 어떻게 하면 기계를 더 똑똑하게 만드나, 인간의 뇌와 비슷하게 만드나 이것만을 고민해왔다. 하지만 BT와 NT가 놀라운 수준으로 발달하면서 인간의 몸과 같고 인간의 판단력보다 우수한,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진 AI를 지닌 인공생명체-로봇의 출현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인간은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칩을 만들면 얼마나 편해질까만 생각했다. 하지만 육체에 의식까지 들어가 추론을 하고 판단을 내리는 존재가 되면 ‘터미네이터’ ‘이글 아이’처럼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역습하는 공상과학영화의 세계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공생명이 각 분야별로 만들어지면 시인, 작곡가, 안무가 등 모든 직종이, 특히 변호사가 앞이 깜깜한 상황이 된다. 모든 판례를 종합, 분석해 정확한 승소율을 계산해내는 AI가 등장하게 되면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진다.
라면 물은 100도씨에서 0.1도씨만 모자라도 끓지 않는다. 99.9도씨에서도 끓지 않다가 0.1도씨가 더해지면 폭발하듯 끓어오른다. 이 비등점을 인간의 과학기술분야에서는 싱귤러 포인트(singular point·특이점)라고 한다. 지금이 바로 기술 발달의 싱귤러 포인트다. 지난해부터 학계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AI였다. 식자층을 주요 독자로 하는 과학전문지 와이어드가 AI를 별첨 특집기사로 다뤘다. 이미 AI가 AI를 앞서는 날이 10년 내에 온다는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생전에 터미네이터를 실제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공상과학영화가 아닌 고급 전문지에서 이것을 이슈로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을 통해서 그것을 실감하고 마치 신기술이 나타난 것처럼 이상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쏠림 현상’의 한국적 풍조라고 할 수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한국 사회에 의미가 있다면 이것을 실감하도록 유도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공상과학영화를 보며 막연하게 농담처럼 해왔던 걱정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의식주, 선거와 정치, 북핵 문제 같은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홀로그램이 광화문에서 시위도 하는 세상이구나’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홀로그램의 유령들이 거꾸로 독재를 할 수도 있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불길한 느낌을 마침내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법칙화할 수 없다
이세돌의 패배보다 중요한 것은 구글의 이벤트가 한국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 마인드 대표 데미스 하사비스는 체스 신동으로, 어머니가 중국계인 영국인이다. 그래서 알파고는 중국식 바둑에 맞춰 개발됐고, 이세돌도 중국식 규칙에 따라 대국에 임했다. 그런데 알파고의 ‘고’는 바둑을 뜻하는 일본어 ‘碁’에서 나왔다.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구글의 생중계가 어려워서 성사되지 않았고, 일본에서는 대국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일본 최고의 바둑기사인 기야마 유타 9단은 최근 성적이 좋지 않고, 기풍도 예상이 가능한 정석 스타일이다. 끼, 감, 깡으로 즉흥적 스타일의 바둑을 두는 선수는 한국의 이세돌이다. 알파고가 서구의 디지털 지능을 대표한다면 이세돌은 한국인의 아날로그 지능을 대표한다 할 수 있다. 아날로그 마인드, 끼와 감과 직관은 한국인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구글이 인정한 셈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골리앗 앞에 선택된 다윗이 이세돌이었다는 것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아날로그 마인드, 즉 디지로그가 인공지능을 헤쳐나갈 수 있는 대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당벌레는 반드시 풀이나 나무의 접점에서 난다. 하지만 실제 실험을 해보면 10마리 중 8, 9마리만 이 법칙에 해당하고, 1, 2마리는 예외다.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 법칙은 아무리 엄밀하게 규정해도 90%밖에 적중하지 못한다. 이것이 퍼지(Fuzzy)이론이다. 선풍기도 같은 풍량을 지속하면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변화를 주면 시원하다. 지능을 가진 생명체는 끝없이 변화하는 자기조직을 통해 진화한다. 이것은 물리법칙이 절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다. NT와 BT와 IT를 결합해 만든 인공생명, 안드로이드는 패턴인식을 통해 의식과 감정까지도 흉내낼 수 있다. 특정 단어를 들으면 슬퍼하거나 상대방이 화를 내면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식으로 반응을 설계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지닐 수는 없다.
걱정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디지로그가 있다. 그들에게는 디지털뿐이다. 전지전능한 터미네이터는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데이터베이스 기술은 확률과 통계의 수학적 기술이다. 아인슈타인이 찾아낸 ‘E=MC²’은 물리법칙이지만, 생명체는 다르다. 굼벵이가 어떤 경로로 기어갈지는 어떤 통계로도, 빅데이터로도 예측하기 힘들다. 생명을 믿을 수밖에 없다. 38억년을 살아온 생물의 유전정보가 디지털 정보와 대결해서 물질이 생명체를 지배하는 ‘기술중세사회’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걱정해야 할 것은 IT 강국, 유전공학 강국이었던 대한민국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깨닫고 다시 시작하자. 기술발전이 신통한 단계에서 비통한 단계로 넘어왔지만, 믿자, 인간의 생명을. 인공지능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디지로그고, 한국인에게는 그 디지로그가 있다.
정리=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lilbo.com
한소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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