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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마드리드에서 누린 뜻밖의 호사

입력
2016.07.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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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근사근하고 음식은 맛있고 유럽인데도 뭔가 기질이 비슷해 한국 사람들이 고향의 향기를 맡는다는 이곳, 스페인. 실제로 여기 머물다 보니 스페인이 좋은 이유가 늘었다. 인구 8만명의 차 없는 소도시 폰테베드라부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까지 스페인 곳곳에서 ‘게이 프라이드’ 축제가 열린다.

올해 마드리드 게이 프라이드 축제는 6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장장 2주에 열렸다. 300만이 거주하는 마드리드에서 거리에 뛰쳐나온 사람이 무려 200만명. 2016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포르투갈이 우승하던 날 리스본에서 벌어졌던 광란의 축제만큼 뜨거웠다. 정말이지 도시의 골목 뼛속까지 ‘프라이드’가 넘쳐 흐르고 이 도시가 온 밑천을 바쳐 성 소수자들의 존재를 환대했다. 길거리의 가게마다, 빌라 창문마다, 호스텔마다, 관공서와 시청마다, 공식 관광안내소마다 성 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걸렸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바르셀로나의 축구 스타 리오넬 메시의 티셔츠와 무지개 깃발이 동급으로 팔린다. 젊음의 거리 ‘홍대’라 할 수 있는 추에카 지역은 서로 눈만 마주치면 물총과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축제를 난다. 옥상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부으면 아래에 있는 ‘무지개’들이 흠뻑 물에 젖어 물을 더 뿌리라고 응답한다.

하지만 죽도록 놀자고 달려드는 분위기에 압도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찌르르했던 것은 딸, 아들을 대동한 수많은 소위 ‘정상가족’들이 마치 새해맞이 보신각 타종행사를 즐기듯 축제에 나오고, 십대들이 너도나도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공원에서 노는 모습이었다. 이만큼 멋지고 즐겁고 자연스러운 인권 교육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온 도시가 사활을 걸고 국가적 명절이라도 되는 듯 성 소수자의 정체성을 축하하는 곳에서 나는 그저 감개무량했다. ‘네가 누구여도, 어디에 있든’ 너의 존재를 환대한다는 포옹이 느껴졌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기 시작한 유럽에서는 이미 보수당 국회의원의 사무실 창문에, 007이 활약했던 영국 비밀첩보부대 ‘MI6’ 본부에 무지개 깃발이 펄럭인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다. 실제로 경험해보니 글로 배운 깨달음이 여름 햇살에 피부가 타듯 살갗에 스며든다. ‘동성결혼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에서 리 배지트 교수는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 오히려 그 지역의 결혼율이 완만하게 증가했으며 지역 업소 매출과 주 정부의 세금 수입이 늘어났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마드리드 주 정부가, KFC와 버거킹 등의 다국적 매장이, 크고 작은 로컬 가게와 호스텔들이 쌍수 들고 나서 ‘무지개’를 반기는 이유다. 반대로 이슬람 국가 중 가장 큰 게이 프라이드 축제가 열렸던 터키에서는 행진이 강제 취소되고, 이스라엘의 행진에서 극우 유대교도의 칼에 찔린 16세 소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씁쓸해진다. 극우 이슬람과 극우 유대교의 혐오 속에서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동성애를 말리는 한국 보수 기독교를 느꼈기 때문이다. 종족 보존, 정상가족 어쩌고저쩌고 하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타인의 성 정체성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시민의 교양이야말로 가족 관계를 넘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근간이 된다고 말이다.

극우 혐오 범죄의 대명사인 나치가 유대인과 더불어 동성애자를 아우슈비츠로 보낸 까닭을 생각해보라.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가 얼마나 자유롭고 성숙한지를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그리고 저출산의 해법은 혐오가 아니라 여성들이 기꺼이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 사회의 가부장성과 심각해지는 양극화에 희망을 잃은 여성들이 재생산권을 놓고 파업을 벌이는 중이니까 말이다. 아, 마드리드에서 호사를 누리고 간다. 이 호사를 언젠가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맛볼 수 있기를 바라며.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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