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의 금지청구권제’ 도입 거론
개인ㆍ기업 중지명령 청구 허용 땐
법원이 가처분 형태로 신속 판단
“기업의 경영 활동 위축시킨다”
악의적 소송 남발 우려도 존재
“공정위 신속한 판단이 유일 대안”
생물정화기술업체 B사는 지난해 2월 기술탈취 혐의로 자동차 업체 A사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자동차 도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맹독성 유기화합물과 악취를 정화하는 미생물제를 A사가 도용했다는 게 B사의 주장이다. 그러나 4개월 후 A사는 돌연 B사에 미생물제 외 다른 화학제품 3종에 대한 납품 계약 중단을 통보했다. B사 대표는 16일 “공정위 신고에 대한 명백한 보복”이라며 “결국 관련 제품의 매출(연 8억원)이 모두 끊기면서 사실상 도산 위기에 놓이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A사 관계자는 “B사 제품에서 발암 물질이 검출(기준치 이하)돼 이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협의를 거쳐 계약이 해지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을’이 ‘갑’의 불공정행위를 제재해 달라고 신고한 후 갑의 보복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를 막을 방법이 없어 ‘을’이 피눈물을 쏟고 있다. 현행 법체계상 ‘공정위 신고→조사→제재 확정’으로 이어지는 기간 갑의 직ㆍ간접적 불공정행위에 을이 대응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 갑의 ‘가격덤핑’(부당염매) 행위를 공정위에 신고한 제조업체 C사 대표도 “원재료와 완제품 시장을 모두 장악한 ‘갑’이 ‘보복’ 조치로 원재료 값을 두 차례 인상한 뒤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는 상황”이라며 “공정위 처분이 나올 때까지 회사가 살아있을 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갑의 보복’을 해소할 현실적인 대안으로 ‘사인(私人)의 금지 청구권 제도’를 제시한다. 이는 개인이나 기업이 거래 상대방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공정위를 거치지 않고 법원에 직접 ‘중지 명령’을 요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지금은 공정거래법 위반 행위에 대한 시정 명령을 공정위만 내릴 수 있는데, 이를 청구할 권한을 개인ㆍ기업(사인)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이동우 변호사는 “사인의 금지청구권이 도입되면 법원이 ‘임시정지’ 등 가처분 형태로 신속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어 갑의 보복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남근 참여연대 변호사는 “통상 법원은 가처분 신청에 대해 3개월 내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도 외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공정거래 법 집행체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통해 이 제도를 검토하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6월 인사청문회 당시 ‘금지청구제 도입 시 공정위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법 위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지적에 “금지청구권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을 때 이해당사자가 직접 그것을 가처분형태로 제기하는 것이기에 매우 효과적인 법 집행 수단”이라고 답한 바 있다.
그러나 사인의 금지청구권 제도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 실제 도입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우선 사인의 금지청구권이 도입되면 경쟁자의 사업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악의적’ 소송이 남발돼 기업의 경영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정완 경희대 교수는 “개인이나 기업이 금지청구권을 남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기업간 분쟁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내릴 경우 자칫 대상 기업이 ‘존폐’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공정거래법이 금지하고 있는 행위 중 어디까지를 사인의 금지청구권 적용 대상으로 삼을지 ▦법원과 공정위의 역할은 어떻게 설정할지 등을 둘러싼 논란도 불가피하다.
이황 고려대 교수는 “법조계는 대체적으로 이 제도에 소극적인 입장”이라며 “사인의 금지청구권을 어디까지 허용해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한 찬반 대립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현실적으로는 공정위가 신고된 내용에 대해 가급적 신속하게 판단을 내려주는 게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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