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민중가요란 말은 있지만 민중건축이란 말은 없다. 민중예술이 정권과 체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동안 건축은 뭘 하고 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3, 4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종이와 콘크리트’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0년 간 이 땅에서 이뤄진 건축운동을 집중 조명한다.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연구사는 이 기간을 “민주화 운동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때”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예술 장르에선 진보적 예술가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분석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반면 건축에선 아직 그런 시도가 없었다”며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건축의 가장 역동적인 시기를 조명한 최초의 기획전”이라고 말했다.
전시엔 청년건축인협의회(청건협), 수도권지역건축학도협의회(수건협), 건축운동연구회(건운연), 4.3그룹, 서울건축학교 등 10여개 건축집단과 건축매체가 소개된다. 당시 한국 사회는 88서울올림픽, 주택 200만호 건설, 분당ㆍ일산 등 1기 신도시의 탄생,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건설 시대의 명과 암이 모두 드리운 시기였다. 이에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건축 제도의 틀을 확립하기 위한 건축가들의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등장한 청건협은 젊은 건축인 300명 이상이 모여 만든 한국 최초의 진보적 건축집단이다. 건축가가 사회 참여와 무관한 장인처럼 취급 받던 시절에 이들은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자 했다. 용산미군기지 활용 방안으로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제안하고, 인천 철거민 집단 이주지를 설계했으며, 내부적으론 건축사 특별전형제도 폐지 운동을 벌였다. 전시에선 청건협의 창립총회 포스터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1988년 결성된 수건협은 수도권지역 10여개 대학 건축학과의 진보적 소모임 협의체로, 가장 짧지만 가장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찾는 것을 넘어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 가능성을 모색했다. ‘민중과 함께 하는 참건축’을 표방하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무허가 주거지 철거에 반대하는 빈민운동에 참여했다. 전시에는 수건협이 80년대 후반 서울 빈민 지역에서의 활동을 정리한 자료집 등을 선보인다. ‘집이란 삶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은 아니다’란 자료집 제목에서 당시 대학생들이 열망한 건축의 유토피아를 짐작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건축의 질을 향상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990년 결성된 4.3그룹은 건축가 14명이 모인 단체로, 이들은 서로의 작품을 발표하고 비평하며 자신들의 건축관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자 했다. 조성룡, 승효상, 김인철 등 지금 한국 건축계의 원로들이 당시 4.3그룹의 회원이었다. 서구 근대건축과 건축이론을 공부하고 함께 일본, 유럽, 인도로 건축기행을 다녀오며 건축이 산업이 아닌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승효상의 건축철학인 ‘빈자의 미학’도 이때의 활동을 바탕으로 확립됐다.
건축집단들의 활동이 대부분 출판물로만 남았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미술이나 음악처럼 작품에 직접 메시지를 새겨 넣을 수 없는 건축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전시 기획자들은 역으로 이 점을 이용해 전시 방향을 종이와 콘크리트의 대비로 잡았다. ‘콘크리트’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복잡한 사회상을 상징한다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청년 건축가들의 짧지만 뜨거웠던 활동을 ‘종이’가 대변한다고 본 것이다. 원래 고려했던 제목은 ‘찌라시와 공구리’였다.
전시가 열리는 9월 1일부터 2018년 2월 18일까지 포럼, 심포지엄 등 부대행사가 이어진다. 9월 23일엔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등이 ‘1987년 이후 한국 건축운동의 두 흐름’을, 10월 25일엔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성재혁 등이 ‘건축 안의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 강의한다. 자세한 일정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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