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태그 폭로 이후 고소ㆍ협박
문화예술계 피해 50여명 달해
‘문학과 여성들’ 토론회서
성폭력 피해 증언 잇달아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에게 처음으로 실형이 선고됐다. 서울서부지법은 17일 김요일(52) 시인을 강제추행 혐의로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해당 고소는 지난해 하반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일어난 ‘문단 내 성폭력’ 고발운동과는 별개로 지난해 3월 피해자 A씨가 김 시인을 고소하면서 진행됐다.
1심에서 승소했지만 A씨는 다시 경찰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피해자들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뉘우치고 있다’는 취지의 사과문을 11월 페이스북 자신의 계정에 올렸던 김 시인은, 한 달 뒤 A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A씨가 트위터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악의적으로 명예를 훼손하고 조롱했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10월 SNS에서 시작돼 들불처럼 번진 ‘#문단_내_성폭력 말하기’ 운동이 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성과가 적지 않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이 공개 사과 후 피해자들을 협박하거나 고소하는 등 2차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17일 서교동 카페 창비에서 열린 ‘#문단_내_성폭력, 문학과 여성들’ 토론회에서 발언자들은 문단 내 성폭력은 일부의 경험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유계영 시인은 “저는 그간 위험한 상황들을 피해 다니기만 했는데, 성폭력을 방조했다는 죄책감이 든다.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문인은 없다”고 단언했다.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졸업생 모임 ‘탈선’의 오빛나리 대표는 “(수업 중에) 문학에서는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는 예술, 청춘을 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존재한다”며 “섹슈얼리티와 성폭력 경계가 흐릿해 문학 속 여성은 대개 ‘성녀’ 혹은 ‘창녀’로 다뤄진다”고 비판했다.
폭로 이후 문학을 읽고 쓰는 감성도 바뀌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수진 소설가는 “저는 여성 화자로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믿었다. 등단 후 8년간 소설 속 화자를 남성이나 무성으로 썼는데, 이것도 일종의 여성혐오임을 (폭로 이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방청하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도 쏟아졌다. 트위터에 시인에게 당한 강제추행을 폭로했던 ‘리을과 시옷’(대화명)은 “사법시스템에서는 폭력이나 위계관계가 입증돼야 강간이 성립한다. 나는 등단하고 싶고 그는 시인이었는데 (성폭력) 상담사가 (내 경우) 왜 위계관계가 성립되냐고 묻더라.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공황장애로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현실과 동떨어진 논의를 비판했다. A씨와 ‘리을과 시옷’을 비롯해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해시태그 폭로를 이유로 고소당했다’거나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문화예술계 피해자는 5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처음 올렸다고 밝힌 ‘매창’(대화명)은 “시를 배우며 성폭력을 당했지만 처음엔 ‘문단 내 성폭력’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며 “문단 내 성폭력의 특별한 지점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 ‘셰도우핀즈’의 활동가 Y는 “가해자는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자신의 가해가 드러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복성 고소를 한다”며 “이제 피해자들의 말하기가 시작됐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성이 잡히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가 소모적 이슈로 끝나선 안 된다는 공론은 문인들의 공동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가 행동 ‘페미라이터’는 성폭력 피해자 증언을 기록하는 ‘2017 말하기/듣기-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출판사 봄알람은 문단 내 성폭력에 관해 여성 기고가 41명이 참여한 책 ‘참고문헌 없음’을 출간한다. 3월 19일까지 텀블벅(tumblbug.com/baumealame4) 후원자에 한해 책을 발송하고, 이후 서점에도 배포한다. 판매 수익금은 문단 성폭력 피해자의 법률 지원비로 쓰인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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