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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호의의 무서운 대가

입력
2017.02.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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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드는 사건이 하나 있다.

김순례(가명)씨가 나를 찾아온 건 7년 전쯤. 그의 아들 최호민(당시 31세, 가명)씨가 자신의 회사(K사)에서 근무 중 사망했다. 사망 장소는 회사 건물 3층 계단. 경찰은 최씨가 계단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 호민이가 자꾸 꿈에 나타나요.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막 울어요. 변호사님, 호민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호민씨가 계단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뎌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는 회사나 경찰의 설명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믿지 못하겠고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는 김순례씨.

사인(死因)을 밝히려면 피해자 유족이 경찰에 진정서 등을 제출해서 사인규명을 위한 절차를 정식으로 밟아줄 것을 요청할 수 있고 그 후에는 사체를 부검해서 법의학적 사인규명 작업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의 의심이 들 경우에는 본격적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 가족들은 진실규명을 해 달라고 내게 요청했고, 나는 호민씨의 사인 규명을 구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관할 경찰서에 제출했다.

사체 부검 결과 호민씨의 사인은 계단의 충격으로 인한 뇌진탕이 아니라 둔기로 인한 뇌진탕임이 드러났다. 타살의 정황이 드러난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수사가 시작된 지 불과 1주일 만에 호민씨 직장동료인 박 모씨가 호민씨 사망 전에 자주 호민씨와 언쟁을 했다는 사실, 사고 당일도 점심시간에 둘이서 따로 식사를 했던 사실 등이 밝혀졌다. 수사관들은 박 모씨를 긴급체포하여 30여 시간 동안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고, 결국 그의 자백을 받아냈다. 회사 사람들과 호민씨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사고 경위는 이랬다.

박씨는 사채업자로부터 급전을 끌어 썼다가 빚을 못 갚게 되자 사채업자로부터 계속 독촉을 받게 되었다. 박씨는 주위 직장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박씨는 사람 좋기로 소문 난 호민씨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호민씨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전세금으로 준비해 둔 3,000만 원을 그에게 빌려주었다. 박씨는 2달만 쓰고 갚겠다고 약속했고, 호민씨는 그 말을 믿었다. 막상 급한 불을 끈 박모씨는 호민씨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세 재계약을 위해서는 주인집이 요구하는 추가 전세금 3,000만 원이 반드시 필요한 호민씨였는데, 박씨는 계속 호민씨를 피했다.

사건 당일도 호민씨가 박씨를 3층 계단으로 불러내면서 언쟁이 시작되었던 것. 호민씨로서는 박씨가 어려울 때 선뜻 도움을 줬는데, 박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박씨는 박씨대로 자신이 약속을 안 지킨 것은 맞지만 호민씨가 자신을 너무 닦달한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던 차에 호민씨가 자기를 ‘거짓말쟁이’라고 하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들고 있던 작업공구로 호민씨 뒷머리를 내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호민씨는 쓰러져 있었고, 박씨는 마치 호민씨가 계단을 헛디뎌서 쓰러진 것처럼 모양새를 만든 후 그 자리를 빠져 나왔던 것이다. 박모씨는 살인죄로 구속 기소되었다.

“우리 호민이 억울함을 풀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제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감사의 뜻을 전하는 김순례씨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만약 박씨가 호민씨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호민씨가 이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박씨는 호민씨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는 했겠지만 호민씨를 죽이는 일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민씨가 박씨에게 주었던 호의(好意), 선의(善意)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섣부른 호의는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무섭고도 뼈아픈 인생의 단면을 본 느낌이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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