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4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연합군이 중국 인민해방군과 첫 전투를 벌인 곳은 50년 10월 말 평안북도 운산이었다. 인민해방군 3개 사단의 포위 공격에 미 제8기병연대 3대대 병사 600여 명이 전사했다. 11월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 1해병사단 3,600여 명이 숨지고 부상 당했다. 중국의 대규모 개입 첩보를 무시했던 미 8군사령부는 우왕좌왕하며 잇달아 방어선을 후방으로 이동 배치했다. 평양 철수(12월 4일)- 흥남 철수(12월 14~24일). 50년 9월 28일 수복했던 서울이 다시 함락된 건 51년 1월 4일의 ‘1ㆍ4후퇴’. 사흘 뒤 수원 방어선이 무너졌다.
전쟁 초기 10개월 사이 서울은 무려 6차례 함락과 수복을 반복했다. 전쟁사는 이를 ‘서울 전투’라 부른다. 개전 사흘 만인 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석 달 뒤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수복전투로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시청사에 태극기를 걸었지만 다시 석 달 여 뒤 인민해방군이 서울을 재점령했다. 2개월 뒤 ‘리퍼 작전’이라 불리는 4차 서울전투로 유엔군이 서울을 재수복했지만 한 달 뒤 인민해방군의 춘계공세에 또 다시 넘어갔다. 4월 말 서울은 최종적으로 유엔군이 장악했고, 직후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자고 일어나면 깃발이 바뀌곤 하던 서울의 수난은 53년 7월 정전협정이 이뤄지기까지 남한 상당수 지역에서 빚어진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수많은 시민들이 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군경에게 사살되고, 이웃들에 의해 죽거나 테러 당했다. 그 참극의 일상이 60년 남짓 전 일이었다.
휴전은 대한민국 국가권력이 보복의 염려 없이 일방적으로 또 항구적으로 ‘빨갱이 사냥’을 할 수 있는 무대를 열었다. 이승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사상 테러로 또 적지 않은 이들이 합법ㆍ비합법적으로 살해 당하거나 옥에 갇혔고, 음지를 전전해야 했다. 물론 그들도 대부분 날조의 희생자였고, 그 야만이 그렇게, 다시 30년 가량 지속됐다.
그럼 이제는 끝이 났는가. 1.4후퇴는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는 한때의 전황보다 더 깊은 상처를 일깨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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