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가 달라졌다.”, “과소평가했다.”
9일 펼쳐진 인간과 기계 간 세기의 바둑 대결을 지켜본 과학자와 프로기사들은 지난해 10월 중국계 프로기사 판 후이와 겨루던 ‘알파고(AlphaGo)’는 이미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전혀 다른 상대와 둔다고 느껴질 만큼 알파고의 실력은 그 동안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알파고는 최고의 프로기사들도 힘든 30수 이상을 내다봤고, 전 세계적 이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꼽은 이번 대국의 관전 포인트는 크게 3가지였다. 알파고가 초반에 이세돌 9단과 경기를 비슷하게 끌고 갈 수 있을지, 형세가 불리해졌을 때 승부수를 던질지, 초반ㆍ중반ㆍ종반의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할지 등이었다. 알파고는 이들 측면에서 모두 과학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바둑에서 ‘강하다’는 의미는 앞으로 진행될 수를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특정 위치에 돌을 놓았을 때 상대가 어떤 수를 두고, 그 이후의 수들이 어떻게 진행될 지를 수를 두기 전 머릿속에 그려내는 능력이다.
알파고는 ‘강해진’ 면모를 초반부터 유감 없이 발휘했다. 이 9단은 과학계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경향과 전혀 다른 수로 대국을 시작했다. 프로기사들의 기보로 학습한 알파고가 혼란을 느끼는지 시험해본 것이다. 알파고는 그러나 과학자들의 예상과 달리 동요 없이 응수했다.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알파고가 자가학습과 자체대국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수에 당황하지 않고 형세를 판단하는 함수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웠을 것으로 분석했다.
알파고는 ‘정책망’과 ‘가치망’의 2가지 인공 신경망으로 작동한다. 정책망은 바둑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나뭇가지 구조로 배치하고, 가치망은 해당 위치에 돌을 놓았을 때 이길 확률을 계산한다. 이 두 신경망을 함께 작동시켜 최적의 한 수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알파고는 프로기사뿐 아니라 아마추어들의 기보까지 보며 연습을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였다면 판 후이의 대국 때와 알파고의 실력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파고는 이세돌과의 대국 전 인간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알고리즘을 가진 ‘쌍둥이 알파고’와도 수많은 대국을 거쳤다. 이날 콘서트에 함께 참석한 감동근 아주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자체대국을 하는 동안 알파고의 신경망은 데이터베이스에 없던 새로운 기보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나 아마 기사들이 잘 두지 않는 수들을 이런 식으로 학습했을 것이란 얘기다. 감 교수는 IBM의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이면서 한국기원 공인 아마 5단 보유자다.
알파고는 이날 전문가들이 깜짝 놀랄 만한 ‘승부수’를 던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국 중후반에는 프로기사들이 보기에 실수로 생각될 만한 수들을 여러 차례 뒀다. 그럴 때마다 바둑계에선 알파고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국이 끝난 뒤 바둑계는 실수로 보였던 알파고의 수가 “철저한 계산으로 나온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고 혀를 찼다. 국내에 2명 뿐인 여성 프로 9단인 조혜연 9단은 “알파고는 경기 내내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적절히 진행했고, 일부 수는 30수 이상을 내다보고 뒀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알파고가 이런 수를 둘 수 있었던 이유가 앞으로의 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함수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덕분으로 보고 있다. 알파고끼리의 대국을 통해 스스로 이 함수의 정확도를 점점 높여온 덕분에 결국 더 먼 형세를 내다볼 뿐 아니라 ‘의외의 수’까지 두는 능력이 갖춰졌다는 설명이다. 감 교수는 “알파고의 이 함수를 응용한다면 앞으로 바둑 이론을 크게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콘서트에 모인 프로기사들은 “평소와 달리 시험적인 바둑으로 대국에 나선 게 이 9단의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의외의 수에 알파고가 맥을 못 출 거라는 과학계의 조언이 오히려 이 9단에게 독이 된 셈이다.
이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알파고는 시간 배분 측면에서도 인간 프로기사에 못지 않은 능력을 보였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에게는 알파고가 자가학습과 자체대국 훈련을 통해 스스로 시간을 배분하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느냐가 의문점으로 남았다. 감 교수는 “서로 다른 알파고끼리 수많은 대국을 하면서 다양한 시간 배분 방식을 계산해 최적의 경우를 찾아낸 것 같다”고 추측했다.
지금까지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알파고가 ‘부분’에 집착한 나머지 ‘대세’를 읽지 못하고 임기응변에도 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판 후이와의 대국에서 이 같은 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5개월 동안 알파고는 이런 약점을 완벽하게 개선했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에 인간이 두려움을 느낄 만하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알파고는 바둑만 아주 잘 두는 기계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최호진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부 교수는 “인공지능이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의 두뇌를 따라오려면 갈 길이 아직 먼 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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