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만3,800시간. 한국 여성이 평생 브래지어를 입고 있는 시간이다. 평균 수명(86세)의 여성이 13세부터 매일 14시간씩 착용한다고 치면 그렇게 엄청난 숫자가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브래지어를 모른다. “대체 왜 이렇게 불편한 거야?” 아무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여자니까 입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을 뿐.
한국일보 기자ㆍ직원 14명이 브래지어 사이즈를 재 봤다. 22년 동안 브래지어를 만든 강지영(46) 비비안 디자인팀장의 도움을 받았다. 자기 사이즈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겨우 다섯 명이었다. “저는 말랐으니까 당연히 75A 아닌가요?” “뚱뚱해서 눌리고 조이는 줄 알았어요.” “백화점 직원이 추천한 사이즈라 믿었는데요.” “늘 답답했지만 여자로 태어난 죄다, 견디자 했죠.” 강 팀장은 “속옷 회사들이 ‘사이즈 알기’ 캠페인을 오래 했는데, 이 정도로 모르는 건 충격적이다”고 했다.
브래지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노브라 패션’이 부담스럽다면, 내 몸을 잘 알고 입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 팀장과 맞춤형 브래지어 스타트업 소울부스터의 박수영(31) 대표가 궁금증 해결에 나섰다. 회계사 출신의 박 대표는 데이터와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다.
“우리는 가슴에 무지했다”
_한국 여성 가슴의 특징은.
박수영(박)=“서양 여성에 비해 퍼진 모양이고, 다른 아시아 여성보다 올라 붙었다. 이전보다 가슴 둘레는 작아졌지만, 가슴 용량이 엄청 커진 건 아니다.”
강지영(강)=“A, B컵이 여전히 절대 다수다. 소수 소비자를 위해 C, D컵을 만들지만 늘 재고가 남는다.”
_많은 여성이 귀가하면 브래지어부터 벗는다. 왜 이렇게 불편한가?
강=“브래지어 탓만은 아니다. 사이즈와 스타일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게 문제다. 매장 직원이 눈대중으로 보고 권하는 대로 입는 경우가 많다. 가격부터 따지기도 하고.”
박=“브래지어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도 잘 모른다. 크기와 가슴 둘레 말고도 알아야 할 게 양쪽 와이어가 연결된 위치, 즉 ‘중심’이다. 중심이 높은 고중심 브래지어는 큰 가슴을 튼튼하게 받쳐 준다. 빈약한 체형, 특히 가슴 윗부분이 없는 여성이 입으면 컵이 뜬다. 가슴이 커도 운동을 많이 해 흉곽이 벌어진 체형이라면 답답하게 느끼는 게 고중심 디자인이다. 저중심 브래지어는 작은 가슴을 힘껏 모아 클리비지를 만들어 주지만, 처진 가슴엔 불편하다. 옆에서 보면 가슴이 납작하게 눌린 모양이 되기도 한다. ‘고중심=큰 가슴, 저중심=작은 가슴’이 진리는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자기 가슴에 무관심한 게 문제다.”
_왜 무관심한가.
박=“2차 성징이 나타나면 대개 엄마가 브래지어를 사다 준다. 엄마가 어릴 때 입은 사이즈를 사 주고, 아이가 자라면 엄마들 평균 사이즈인 80A를 사 준다. 아이는 불편해도 ‘엄마가 사 줬으니 맞겠지, 브래지어가 원래 이런 건가 보다’하고 꾹 참는다. 성인이 되면 귀찮아서 또 참는다.”
강=“아이를 상점에 데려가 사이즈를 재고 브래지어를 사 주는 부모는 거의 없다. 그냥 제일 작은 걸 사 준다. 시작부터 잘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홈쇼핑에서 사이즈별로 몇 개씩 묶어 파는 저가 브래지어가 잘 팔리는 걸 보면, ‘브래지어는 몸을 가리면 그만인 도구’라는 인식이 여전한 것 같다.”
_딱 맞는 사이즈는 어떻게 확인하나.
강=“전문 매장에서 윗옷을 다 벗고 재고 상담하는 게 최선이다. 부끄러우면 줄자로 스로 재도 괜찮다. 국내 브랜드의 경우, 가슴 바로 아래 흉골 둘레가 75, 80, 85 사이즈 순으로 커지는 밑가슴 둘레다. 유두를 지나는 둘레는 윗가슴 둘레다. 윗가슴과 밑가슴 둘레 차이가 컵 크기다. 차이가 10㎝면 A컵, 12.5㎝면 B컵 식으로 2.5㎝를 기준으로 커지거나 작아진다. 등 뒤에 거울을 놓고 줄자가 수평인지 확인하며 재는 게 요령이다. 잰 사이즈를 덜컥 사지 말고, 한 치수씩 크거나 작은 사이즈를 다양하게 입어 봐야 한다. 청바지는 입어 보고 사면서, 왜 브래지어는 그냥 사나.”
박=“매장 점원을 너무 믿는 건 위험하다. 백화점 8곳을 다니며 사이즈를 재 봤는데, 엉터리인 곳도 있었다. ‘가슴이 어떻게 생겼어요?’ 대신 ‘어떤 디자인이 좋아요?’라고 묻는 것도 여전하다.”
강=“요즘 판매 직원은 가슴 사이즈 측정 교육을 꼼꼼하게 받는다. 그럴 리 없다(웃음).”
“와이어, 유죄일까?”
_브래지어가 불편한 건 결국 와이어 때문인가.
강=“와이어 없이 컵 모양이나 패턴만으로 가슴을 지지하고 모으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런 기능을 포기할 수 없다면, 조금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 요즘 쓰는 하이플렉스 와이어는 탄성이 좋아 그나마 착용감이 괜찮은 편이다. 와이어를 쓰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딱딱한 철 와이어였다. 대안으로 나온 게 체온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형상기억합금 와이어인데, 비싼 게 단점이다. 하이플렉스 와이어는 소프트, 스트롱 타입이 있으니 입어 보고 사자.”
박=“와이어엔 죄가 없다. 가슴 사이즈와 구조가 문제인데도 와이어만 탓하면 평생 편안한 브래지어를 만날 수 없다. 와이어 없는 노와이어 브래지어는 제조 공정이 간단하고 단가가 싸다. 어느 정도는 상술이라는 얘기다. ‘와이어에서 가슴을 해방시켜라’는 마케팅이 먹히는 면도 있다.”
_와이어 때문에 유방암에 걸린다고 하는데.
박=“금속 와이어가 림프액의 흐름을 막아 암을 유발한다는 설이다. 2009년 미국에서 나와 확 퍼진 주장인데, 과학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안다. 전문 학술지에 실린 연구 결과도 아니다. 유방암의 원인은 호르몬, 유전, 생활 습관 등 복합적이다.”
_브라렛(와이어, 몰드가 없고 가슴을 넓게 감싸는 브래지어)이 대안인가.
강=“예전엔 와이어 없는 브래지어를 아줌마ㆍ할머니용이라고 했는데, 인식이 바뀌었다. 자기 몸 긍정주의와 맞물린 트렌드다. 브라렛은 착용감이 좋고 유두 노출을 피할 수 있는 게 장점이지만, 모으고 받쳐 주는 기능은 미미하다. 와이어 브래지어와 브라렛의 장점을 접목하는 게 요즘 고민이다. ”
박=“브라렛을 택한다면 옷 맵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대세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_노브라 패션도 괜찮은가.
강=“말리고 싶진 않다. 자신감과 철학의 문제다. 브래지어 만드는 사람이니까 ‘꼭 입어야 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박=“유두 노출은 그래도 부담스럽다. ‘우리 속 원숭이’가 되는 느낌을 감수할 자신이 없다.”
_브래지어를 안 입으면 가슴이 처지나.
박=“가슴은 그물 같은 조직이다. 운동 등으로 크게 흔들려 조직이 끊어지면, 다른 신체 조직과 달리 재생되지 않는다. 자세가 나쁘면 체형이 서서히 바뀌듯, 가슴도 마찬가지다.”
강=“얼마나 과격한 운동이냐, 가슴이 얼마나 크냐에 달렸다. 요즘 스포츠 브래지어는 소프트ㆍ하드 타입으로 나뉘니 운동 강도에 따라 골라 입는 게 좋다.”
_끈 없는 브래지어는 왜 흘러내리나.
강=“끈 없는 스타일의 수요가 있어 만들긴 하는데, 잘 맞는다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다. 컵과 밴드만으로 브래지어를 고정시키는 건 어렵다. 컵이 작으면 가슴이 눌리고, 밴드가 작으면 불편하다.”
박=“그냥 투명 끈 브래지어를 입는 게 낫다.”
_브래지어를 노출하는 ‘시스루 패션’은 어떤가.
강=“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한, 개인 취향의 문제다. 예전엔 하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브래지어를 입어 비치지 않게 하라고 권했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중요한 건 자기 만족이다. 브래지어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패션 아이템이다.”
박=“보일 듯 안 보일 듯 브래지어를 노출하는 게 고혹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_브래지어 해외 직구는 모험인가.
박=“시행착오를 감수한다면 도전해도 괜찮다. 한국 여성에게 한국 브랜드가 최선인 건 아니다. 딱 맞는 운명의 브래지어가 해외에 있을 수 있다(웃음).”
_브래지어 관리법은.
강=“중성세제로 조물조물 손으로 눌러 빠는 게 원칙이다. 뜨거운 물에 빨거나 삶는 건 금물이다. 손빨래가 귀찮으면 전용 세탁망이라도 써야 한다. 세탁망엔 브래지어 2, 3개만 넣자. 세탁기에 탈수하거나 비틀어 짜면 안 된다. 모양을 잡아 그늘에서 말린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김도엽(경희대 정치외교 3)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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