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의 달인’ 이생강(李生剛)씨가 입대하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다.전세계를 돌며 신기에 가까운 피리 솜씨를 선보인 그가 군예대에 입대하자 사단장 파티에 나 대신 불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졸지에 찬밥신세가 됐다.
“야 임마, 파티에 다녀왔으면 뭘 내 놔야 할 것 아냐.” 이씨는 그 때부터 내게 진짜 매를 많이 맞았다.
얼마 뒤에 입대한 정재국(鄭在國ㆍ현 국립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씨도 피리를 잘 불었는데, 이 사람도 내게 많이 맞았다.
이들이 흠씬 두들겨 맞은 날 밤, 부대 뒷산에서는 어김없이 구슬픈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새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뺏어간 동생을 괴롭히듯 이들에게 못살게 군 것이다.
내가 유명해진 후 나를 만난 이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소원은 오로지 제대증을 하루 빨리 받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백배사죄한 기억이 새롭다.
이제는 지금의 내 아내와 만나 결혼하고 부대 근처에서 신접살림까지 차렸던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단장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렵이다. 당시 나는 사단장과 동급인듯 우쭐해서 폼을 재고 다니던 때였는데,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예사졸병과 달랐다.
화천 시내를 사복을 입고 돌아다닐 정도였다. 이때 우리 부대 소령의 딸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알게 됐다. 나는 너무나 예뻤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부잣집 아들이라고 또 한번 거짓말을 했다. 순진했던 아내는 내 거짓말에다 당시 나의 화려한 의상과 말솜씨에 넘어갔고 우리는 결국 1962년 부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 선생님은 나를 친아들처럼 총애했던 전부일(全富一ㆍ현 ㈜영남화학 대표이사) 사단장이었다.
우리는 부대 근처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일반 사병이 이런 혜택을 누린 것은 대한민국에서 내가 유일할 것이다. 신접살림 역시 누구 못지않게 풍족했다.
병참부대에 부식을 타러 가서 콩나물이나 된장 같은 부식을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귀한 쇠고기국도 끓이고, 쇠고기 장조림까지 해먹고 살았다. 이웃들에게 부식을 팔아 돈까지 마련해 춘천에 계시던 아버지의 약값까지 부쳤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내 바람기가 끝난 것은 전혀 아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당시 화천 시내에 민생약방이라고 제법 큰 약국이 있었다.
그 집에 미순이라는 고2짜리 딸이 있었는데 고전무용을 하는 친구라서 군예대 공연 때마다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눈이 맞아 뚝방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눴다.
이러한 행각은 결국 아내에게 발각됐고 아내는 “더 이상 못살겠다”며 처가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발이 닳도록 빈 끝에야 겨우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미순씨는 1980년대 극장쇼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고, 이후에도 호텔 디너쇼의 단골손님으로 나를 찾아왔다.
지금도 아내는 우리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군예대 시절은 그래도 살 만한 시절이었다.
2년여 동안 수백 회 공연을 하면서 인기도 높았고 결혼까지 했던 때였다. 그러나 1964년 8월 제대 후 나선 바깥 세상은 내가 상상하던 멋진 곳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생활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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