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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에 묶이고 稅폭탄 맞고... 길 잃은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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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에 묶이고 稅폭탄 맞고... 길 잃은 기부

입력
2014.12.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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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 인천지사 자원봉사자들이 인천공항 이용객들이 기부한 동전을 분류하고 있다. 인천지역 다문화가정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사용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한적십자 인천지사 자원봉사자들이 인천공항 이용객들이 기부한 동전을 분류하고 있다. 인천지역 다문화가정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사용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평생 모은 재산 5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세운 최재선(75) 일곡문화재단 이사장. 살아생전 좋은 일 한번 해보자고 재단을 만들었지만 운영이 이렇게 까다롭고 힘든 줄 몰랐다. 발목 잡는 규제들이 많은데다 최근에는 저금리 쇼크까지 몰아쳐 재단 금고는 텅텅 비어가고 있다. 예금이자 1억원 중 70%는 규정 상 목적사업(장학)에 써야 하니 3,000만원으로 재단을 꾸려야 하는데, 직원 한 명 봉급 주고 사무실 한 칸 운영하기도 어렵다. 연간 100명 수준이던 장학금 수혜자도 20명으로 줄었다. 재단 만들겠다고 조언을 구하던 그의 친구들 가운데 정작 설립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당연해 보였다. 내 돈 사회에 기부하는 게 왜 이리 어려워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그의 토로이자 후회였다.

●저금리에 울상 짓는 공익재단, 투자제한 풀어야

대표적인 부자기부 형태인 공익재단은 공익법인법에 따라 출연한 재산(기본재산)에 손댈 수 없다. 필요경비는 모두 수익사업으로 충당해야 한다. 하지만 위험이 따르는 사업은 거의 불허돼 예금이자 이외 방법으로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 그런 공익재단에 몰아친 저금리 쇼크는 재단 유지마저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연 2%의 저금리로는 운영비 마련도 어려운 처지다. 저금리 시대의 재단은 진정한 사회공헌 방안이 아니라는 회의가 나올 정도다. 최 이사장의 돈 50억원을 장학재단이 아닌 지금 당장 필요한 곳에 사용하면 더 많은 사회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물론 현행법도 법인 설립목적과 본질에 반하지 않는 정도의 수익사업을 허용하나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사업마다 주무관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대개 영리 성격의 사업 승인은 거의 내주지 않는다. 다른 장학재단 관계자는 “손실 발생시 원상복구 각서까지 요구하는데 재단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사회복지법인과 의료법인, 학교법인 등을 제외한 민간 재단법인 1,190개 중 63.7%가 자산규모 50억원 미만(2010년 기준)이다. 따져보면 사회에 기부된 3조원 가량의 출연금이 규제 탓에 장기예금으로 묶여 금융기관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있는 꼴이다. 이상신 서울시립대 교수는 “과거 고금리 시대에 만든 법을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며 “무조건 제한하기보다는 기본재산의 20~30%에 대해 재량권을 주는 방식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정부가 재단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재단 이사회가 위험성과 수익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한다.

● 선의의 기부 막는 5% 과세 족쇄

주식을 기부할 경우 회사지분의 5%가 넘으면 과세하는 것도 기부를 막는 대표적 규제다. 애초 공익법인이 출연자의 지주회사로 간접지배에 이용되거나 상속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지금은 기부 의욕만 꺾고 있다는 지적이다. 2002년 구원장학재단 설립자 황필상씨는 회사주식 90%(210억원 상당)를 모교인 아주대에 기부했다가 6년 뒤 140억원의 증여세를 부과 받았다. 그의 기부행위를 세법상 증여로 판단한 세무서가 기업이 공익법인에 주식을 출연할 때 5%를 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을 위반했다고 걸고 넘어진 것이다. 법원이 2심에서 세무당국의 손을 들어줘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이 2심을 확정하면 재단은 증여세와 지난 5년 간 가산세를 더한 240억여원을 물어야 한다. 재단 관계자는 “소송에서 지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과 제도가 기업가가 더 많은 주식을 출연하도록 장려하지 못할 망정 이를 막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기부왕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는 기부금의 대부분을 주식으로 내놓고 있다. 김희정 한국NPO협의회 사무국장은 “사회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가치가 확산되고, 정부도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한 혜택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 기부할수록 손해 만드는 규제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지는 각종 규제는 기부문화 활성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부동산을 기부할 경우 이를 테면 농사 목적이 아니면 농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현행 농지법 때문에 비영리단체에서는 기부를 받을 수 없다. 올해부터 세액공제로 바뀐 기부금 세제 혜택 방식 역시 고액기부를 제한하는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기존의 소득공제 방식은 소득이 많을수록 세율이 높아 고소득층일수록 공제 혜택이 컸다. 하지만 소득과 상관없이 기부금의 15%가 공제되는 세액공제로 바뀌면 과세표준이 4,600만원을 넘는 중산층부터는 소득공제 방식보다 세금 혜택이 줄어든다. 최영우 도움과나눔 대표는 “일정 금액 이상을 기부하게 되면 세제 혜택이 줄어드는 등 고액기부 확대에 불리한 시스템”이라며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에 부자들의 자선적 기부를 통해 사적으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조세정책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 새로운 모금방법 가로막는 현행법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영향력이나 인터넷플랫폼을 통한 모금, 포인트 기부 등 온라인 기부가 늘고 있어 이에 걸맞게 기부금품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2005년 국내 최초로 온라인 기부포털 사이트가 문을 열었다. 네이버의 해피빈이다. 아고라를 바탕으로 한 모금 사이트 희망해, 아름다운재단의 개미스폰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행복주식거래소 등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대중모금을 하는 온라인 크라우드 펀딩 방식이다. SNS를 통해 홍보가 됐을 때 금방 목표금액을 달성할 수 있지만 관련 제도가 없어 오히려 기부를 가로막고 있다. 기부금품법에 따라 1,000만원 이상 기무금품을 모집할 때는 모금 목적과 목표액, 방법, 기간 등을 지방자치단체나 안전행정부에 사전 등록해야 하는데 이는 온라인 크라우드 펀딩이 성장하는 데 제약이 된다. 예상치 못하게 모금액이 1,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 모금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다. 해피빈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모금액수를 1,000만원 미만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걸음마 수준 부자기부, 박수치는 풍토도

부자들의 기부에 박수 쳐주는 풍토도 조성돼야 한다. 카네기 재단, 록펠러 재단, 포드 재단….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사재를 털어 세운 대표적인 가족재단이다. 미국은 가족재단 설립을 통해 자선적 기부를 하는 게 활성화돼 있다. 전체 재단 7만5,595개 중 절반이 가족재단(3만7,804개)이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2008년 재산의 90%를 기부하겠다는 기부서약(The Giving Pledge) 운동을 시작했다. 부자들의 선행은 의무여야 한다는 뜻에서다. 우리나라에도 이를 본 따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만든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가 있다.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으로 일종의 한국형 기부 서약이다. 2008년 6명을 시작으로 해 현재 646명이 회원이고 727억원이 약정돼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부자들의 기부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란 게 대체적인 평가다. 기업가 개인이 사재 출연이 아닌 기업 돈으로 재단을 세우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다. 지난해 국내 30대 그룹이 운영 중인 26개 공익재단들이 전년보다 20.4% 늘어난 2,700억원을 기부 활동에 지출하는 등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늘고 있다. 하지만 기업재단은 오너의 권한이 막강하고, 모기업 의존도가 높아 긴 안목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한계가 뚜렷하다.

한국여성재단 관계자들이 100인 기부 릴레이 행사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3년 시작돼 올해 12회째인 이 행사는 이어달리기 하듯 기부자들이 차례로 서로를 모집, 나눔의 순환을 보여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여성재단 관계자들이 100인 기부 릴레이 행사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3년 시작돼 올해 12회째인 이 행사는 이어달리기 하듯 기부자들이 차례로 서로를 모집, 나눔의 순환을 보여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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