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월 20일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가 일어났다. 경찰이 재개발로 집과 가게를 잃게 된 영세 세입자 농성을 진압하던 중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숨지고 23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 불이 꺼진 뒤 드러난 것은 저들 시신뿐 아니라 대한민국 법치의 비루한 현실이었다.
서울시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인 용산4구역(한강로3가 63~70번지 일대 5만3,442㎡) 세입자들은 재개발조합(토지ㆍ건물 소유주)이 제시한 휴업보상금 3개월분과 주거이전비 4개월분에 수긍할 수 없었다. 그 땅에는 40층 규모 초대형 평형의 주상복합 아파트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부동산 소유주와 시공사는 당연히 더 부자가 될 테고, 수도 서울의 중심을 자부하는 용산은 한층 메가 시티의 위용을 갖출 터였다. 다만 한 푼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나게 된 영세 세입자만 죄 없이 더 가난해져야 한다는 거였다.
그 보상금 받고 나간 이들(763명, 전체의 86%)의 사정은 저마다 다를 테다. 그나마 형편이 나아 다른 자리를 알아볼 만했을 수도 있고, 나랏일이니 어쩌겠냐고 여겼을 수도 있고, 버텨봐야 달라질 것 없으리라 경험으로 짐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은 100여 명의 사정은 거의 같았다. 그들은 더 물러설 데가 없었다. 그들 일부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등 30여 명이 1월 19일 철거 직전인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오른 것은 몸으로라도 철거를 늦춰 자신들의 사정을 좀 더 세상에 알려보기 위해서였다. 경찰특공대와 용역업체 직원들의 진압이 시작된 건 바로 다음날 새벽이었다.
화재 원인, 참사 원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전쟁터도 아닌 서울 도심에서 6명이 숨졌다는 사실이다. 경찰은 농성자들이 인화성 물질(시너)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장에 화학소방차조차 대기시키지 않았다.
검찰은 농성자 20명(5명 구속)과 용역업체 직원 7명을 기소했다. 경찰청은 참사 원인을 불법 과격시위로 돌리기 위해 조직적인 여론 조작을 시도했고, 청와대 행정관(이성호)은, “개인적 판단에 따라” 용산참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다른 사건으로 돌리라며 서울경찰청 공보담당관에게 이메일로 지시했다. 공권력이 진 법적 책임은 전무했다.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는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지역구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용산 참사는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 이래 끊임없이 반복돼온 도시빈민 잔혹사의 연장이었다. 재개발도 철거도 ‘합법’이었고, 조합이 제시한 쥐꼬리 보상금도 법을 어긴 처사는 아니었다. 경찰 진압도 검찰과 법원 판단으로는 책임질 과실이 없는 게 됐다. 2015년 6월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으로 상가 권리금이 보호받게 됐지만, 용산과 같은 재개발 사유는 여전히 보호 대상이 아니다. 어디서건 다르지 않을 참변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쩌다 보면 ‘합법적으로’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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