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5월29일로 14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났다. 4년간의 외도가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런 후회가 없다. 정치인 생활을 해본 것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한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평생을 코미디언으로만 살았다면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너무 국회의원 욕을 한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 보고 “일 안 한다” “거짓말쟁이다”라고 욕하지만 국회가 없어지는 순간 그 국가는 독재가 된다.
국회의원이 이렇게 큰 역할을 하는데도 우리나라만큼 의원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나라도 없다. 다른 나라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14대 대선이 끝난 뒤니까 93년 여름 휴가 때의 일이다. 가족과 함께 하와이 마우이 섬으로 휴가를 갔다.
골프장이 딸린 고급 호텔에 묵기로 했는데 마침 온 가족이 쓸만한 방이 없었다. 방 하나가 비었다고 해서 가봤지만 귀퉁이 방이라 너무 좁고 엉망이어서 우리는 그냥 나왔다.
그러자 우리를 안내했던 재미동포가 “의원님, 혹시 영문으로 된 명함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국회의원 명함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5분도 안돼 호텔 총지배인이 뛰쳐나왔다.
뭐라고 인사를 하더니 우리를 곧바로 스위트 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과일 서비스에 종업원들까지 와서 인사를 했다.
식당 종업원들도 말끝마다 “예스, 서(Yes, sir)”였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국회의원이란 존경의 대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풍토가 정말 부러웠다. 한국이었으면 국회의원 한 명에게 그렇게까지 대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원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초반 1년이었던 것 같다. 92년 3월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나는 온갖 후원회에 끌려 다녔다.
분명히 내가 국민당 의원인데도 여야 가릴 것 없이 나를 불러 행사장을 웃겨보라고 했다. 야한 이야기로 사정없이 웃기면 “국회의원 체면 좀 생각해라”라고 그러지, 점잖게 무대에 서면 “국회의원 됐다고 건방 떠냐?”고 그러지….
연예인 신분이라면 돈이라도 받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여전히 코미디언 이주일이었다.
이러한 대접은 내가 그 해 가을 국정감사에서 독한 모습을 보일 때까지 계속됐다. 국감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정주일 의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국민당 동료 의원들조차 나를 ‘이 의원’이라고 불렀다. 툭하면 “또 코미디 하냐?”라고 비아냥대기 일쑤였다.
30회 정도 계속된 내 정치 일화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당선 직후 김정남(金正男) 의원, 봉두완(奉斗玩) 전 의원과 함께 그의 연희동 자택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당선 인사차 방문한 자리이기도 했지만, 91년 11월 아들 창원(昌元)이 장례식 때 찾아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때 그는 장세동(張世東) 전 안기부장, 안현태(安賢泰) 전 청와대 경호실장 등 측근 30명을 이끌고 영안실을 찾아왔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멋진 의정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정 의원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국민을 대표해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 의원은 이미 국민 전체를 즐겁게 해준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이 말대로 4년을 보냈는지는 독자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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