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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한강다리 위 SOS 생명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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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한강다리 위 SOS 생명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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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3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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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투신 前 전화 한통이 소녀를 살렸다

가정파탄, 가난, 집단 따돌림,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다리 위로, 죽기 직전 마지막 걸어 본 전화 한 통이 그녀를 살렸다, 그녀는 세상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재생시간 27분35초. 이어폰을 귀에 꽂자, 생사의 갈림길에 선 생면부지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3개월 전 삭막한 한강 다리 위에 흩뿌려졌을 그 음성은 무한 반복되는 재생기를 타고나와 물에 잉크가 스미듯 영혼의 심연에 닿았다.

'그 숱한 자살 시도가 솔직히 기사가 되냐고, 자극적이고 모방 우려도 있지, 급박해 봤자 밀고 당기다 말겠지, 그런데 통화시간은 왜 이리 길어.' 한국생명의전화에서 어렵게 건네준 자살 시도자의 음성파일을 열기 전 샘솟은 알량한 직업의식은 그녀의 첫마디에 무너졌다.

소녀와 상담원의 대화를 글로 풀면 4,000자가 넘지만 요약은 60자 남짓이면 족하다. '가정파탄, 가난, 집단 따돌림, 우울증에 시달리던 15세 소녀, 마포대교에서 투신하려다 생명의전화 덕분에 구조.'

하지만 엉엉, 흑흑, 으으, 어어엉 쉴새 없이 흐르는 그녀의 흐느낌을 글에는 오롯이 입힐 수가 없다. 가냘픈 새소리를 닮은 그녀의 목소리도. 기자의 덩둘함을 탓하며 날것 그대로의 통화내용을 에누리없이 편지로 다시 엮는다. 어쩌면 소녀는 상담원이 아니라 무관심한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지 모른다. 중간중간 숫자는 상담원 음성 부분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말을 소녀에게 했을까, 답은 말미에 있다.

TO 제 얘기를 들어주실 분

①저~기요. 제 얘기 좀~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②제가요, 열다섯 살 먹었는데요, 허허(눈물 젖은 웃음). 또 자살 또 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보여서 한번 해봤어요. 제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③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할머니 댁에 맡겨졌거든요. 그러다 어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랑 연락이 돼서 같이 살게 됐어요. 아빠한텐 연락도 없고 (흐느낌) 돈 벌어오는 사람도 없는데 (흐느낌) 제가 또 여기(서울) 올라와 적응을 못해서 왕따도 많이 당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정신과도 다니고 입원하라는 소리까지 들어본 적 있고요. 그리고 엄마가 욕을 해요. 'XX년'이라고. (흐느낌) 제 편은 아무도 없어요. 친구도 아무도 없고, (흐느낌) 외롭고 서러워서.

④(흐느낌) 여기 높네요. 참 높아요. 많이 높네 (바람소리) 어떻게 해요. (흐느낌) 솔직히 많이 무서워요. 근데 물이 참 맑아요. 난 더러운데 물은 참 맑아요. 친구들이 저보고 죽으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죽으러 왔는데 막상 죽으려니까 무서워요.

⑤전부 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달라지는 게 없어요. 꿈도 희망도 다 버려버렸어요.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갑자기 돈도 없어서 알바도 뛰어야 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안 된다고 하고 돈 벌어오는 사람 아무도 없고. 돈도 없고 지금 자퇴했어요. 친구들이 무서워서, 학교 친구들이 너무 무서워(말을 잇지 못한다) 집에는 엄마는 거의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흐느낌)

⑥저랑 있기 싫다고. 엄마도 밉고 아빠는 더욱 미워요. 아빠가 바람을 피웠대요. 엄마가 아빠는 XX새끼래요. (흐느낌) 엄마는 일도 안 한고 놀아요. 할머니가 엄마보고 못돼 처먹은 애래요. 기초수급 모녀가정으로 나라에서 돈 주는 거, 그걸로 먹고 살고. 카드 빚도 많고 제가 전에 자살 시도 한번 더 했거든요.

⑦다리 밑에 보고 있는 거 맞아요. 다 나 때문이래요. 하나도 이제 안 무서워요. 다 나 때문이래요, 나 때문이래요, 나 때문이에요. 다, 전부 다 내가 미친X이래요. 전부 다 나 때문이래요. XX년이래요. 너 빨리 죽으라고, 왜 안 죽냐고. 머리가 텅 빈 거 같아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아요.

(대화는 11분 정도 지났다. 당시 상담원 박현규(45) 생명의전화 교육실장은 "이제 안 무서워요"란 소녀의 말을 듣고 동료에게 손짓으로 119에 신고할 것을 부탁했다. 두려움이 사라진 건 위험한 징후였기에. 이후 박 실장은 관심을 돌리기 위해 집 위치, 인상착의, 식사 여부, 소지품 등 일상에 얽힌 소소한 질문을 이어간다. 소녀는 상경 전 대구에서 놀이동산을 다녀온 게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했다. 박 실장도 울기 시작했고, 소녀의 목소리는 감당하기 버거운 눈물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⑧액세서리를 안 하면 너무 불안해요. 막 죽으려고 며칠 동안 굶어본 적도 있고요. 칼로 막 그어본 적 있어서 팔에 아직도 상처가 많아요. (죽으려고 정신과 약 일주일분량을 먹고 3일간 잔 적도 있다고 했다) 마지막 자살시도가 이거예요. 뛰어내리는 거요. 근데 여기는 뛰어내리면 벌금내야 한다면서요, 엉엉.

⑨근데 아직 그럴 마음 없어요. 약 먹고 뛰어내려서 죽을 거예요. 아까 친구랑도 통화 다 해봤어요. 친구가 살 생각하래요. 근데요, 친구한테 미안한데 약속 못 지키겠어요. 어차피 죽어도 울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죽으면 끝이래요. 다 날 싫어해서 전부 다 나를 싫어해요. 아저씨낮?제 얘기 들어준 사람은 OO상담소의 아저씨밖에 없어요.

⑩기분과 다르게 날씨가 좋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요. 기분은 너무 안 좋은데, 근데 가뿐해요. 가벼운 기분이 들어요. 뭐야, 누가 왔어요. 경찰인가 봐. 손 흔들었어요. (이후 들리는 건 그녀의 울음소리뿐)

FROM 2012년 6월 1일 오후 5시 마포대교에 선 15세 소녀

PS> 음성파일의 마지막 1분은 119대원이 소녀를 경찰에 인계하는 과정, 서울시자살예방센터에 소녀를 보내달라는 상담원의 요청 등을 듬성듬성 담고 있다. "안 그러면 다시 시도할 것 같거든요"라는 상담원의 얘기가 귀에 박힌다. 소녀는 후속 상담을 받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것으로 돼있다. 석 달이 지난 지금, 또래 소녀가 자살했다는 보도는 다행히 없다. 부디 살아있길.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사선(死線)에 올라 "제 얘기를 들어달라"고 전화를 걸어온다. 지난해 7월부터 한강다리 위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는 1년간 32명(소녀는 26번째다)의 자살을 막았다. 다리 위 생명의전화 수신자가 바로 당신이라면 그들은 애원할 것이다. 이웃이 죽어가고 있으니 주위를 둘러보라고, 귀 기울여 달라고. 이달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 10주년이다.

■ 상담원이 15세 소녀에게 건넨 말

① 네, 생명의 전화입니다

② 네,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근데 왜 마포대교에서 전화를 했어요

③ 네, 말해봐요

④ 우리 친구 울지 말고 얘기해봐요, 설마 그러려고 간 거 아니죠

⑤ 앞으로 살아갈 날 희망찬 날이 있는데. 지금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거 지나고 보면 금방 이겨낼 수 있어요

⑥ 얘기하는 거 보니까 굉장히 맑고 똑바른데 정신적으로 많이 아파요? 집에는 매일 가죠

⑦ 우리 친구 설마 다리 밑에 보고 있는 거 아니죠

⑧ 아저씨도 너무 슬퍼지네요, 팔찌는 왜 그리 많이 착용했어요

⑨ 우리 친구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예요. 점심도 안 먹었으면 빨리 다리를 벗어나야겠네

⑩ 기다리면 얘기 들어줄 사람 많이 있어요. 마포대교 위 날씨가 어때요

*총 질문 수는 50개가 넘어간다. 같이 한숨 쉬고, 같이 울고 공감하되 상담원 자신의 얘기는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상대가 하고 싶어하는 말, 영혼의 응어리를 끌어내주는 게 역할이므로.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강아름기자 saram@hk.co.kr

■ 문득 눈에 띈 전화… 32명 죽음문턱서 발돌리다

'42.6'. 이 수치는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숫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인구10만 명당 31.2명)라는 불명예를 얻은 지도 오래다. 10년 새 자살이 사망 원인 8위에서 4위로 수직 상승한 것도 기막힌데, 10~30대로 좁히면 자살이 암 등 각종 질병을 제치고 사망원인 1위라는 통계 앞에선 말문이 막힌다.

이런 암울한 통계 숫자에 포함될 뻔한 사람들이 있다. 죽음의 장소로 한강다리를 택했던 이들. 하지만 그곳에서 눈에 띈 'SOS생명의전화'의 수화기를 들면서 다시 생(生)을 선택한 32명이다.

자살 충동 이유, 생활고>이성>진로 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이 지난해 7월 투신자살이 잦은 마포대교와 한남대교에 각 4대씩 설치해 현재 운영중인 SOS생명의전화에 걸려온 자살 관련 상담 총 32건을 분석한 결과, 20대가 11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 30대(3명), 40대(3명)보다 10대(5명)가 더 많이 수화기를 들었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 원인은 생활고(7명)가 가장 컸다. "외환위기 때 사업이 부도나 이혼하고 신용불량자가 돼 지금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3일간 먹지 못했고 살기 싫다"(50대 남)고 울부짖는가 하면, "월세를 못내 집주인에게 쫓겨났는데 겨울이라 일거리도 없다. 전에 농약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실패했다"(30대 남)고 호소하기도 했다.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이정표를 잃고 한강 다리로 향한 것이다.

이성(6명)과 진로(5명)에 대한 불안감도 자살 시도의 주요 원인이었다. "항공기 승무원을 하고 싶은데 뜻을 이룰 수 없어 다른 사람보다 내가 하찮게 여겨 진다"(10대), "수능을 봤는데 원하는 학교에 갈 성적이 아니다"(10대), "1년 사내커플이었는데 계속 삐걱거리다가 헤어졌다"(20대) 등 주로 10, 20대의 자살결심 원인들이다.

이 밖에도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 준비 중인 가정주부, 빚더미에 앉은 중년 남성,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휴가 후 자대 복귀를 하지 않은 군인 등 자살을 떠올리게 된 원인들은 다양하다.

수화기 드는 건 "살고 싶다"는 신호

인적 드문 다리 위에 세워져 있는 SOS생명의 전화는 일반인들에겐 뜬금 없는 통신시설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겐 느슨하게나마 자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생명 줄이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자살을 마음먹은 사람이라도 머리 속에 죽고 싶은 생각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자살 충동과 살고 싶은 욕망이 뒤죽박죽인 상태에서 한 순간 극단적 상황으로 2%만 더 기울어지면 자살을 하게 된다"며 "일단 다리 위에서 수화기를 들었다는 건 '내 얘기 좀 들어달라' '살 이유를 알려달라'는 신호"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생명의전화를 받는 상담원들은 상대방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의 고민을 인정해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죽으러 왔지만 다리 밑을 보니 무섭다"고 하는 학생에게는 "아저씨도 차도 쌩쌩 달리고 바람도 부는 다리 위에 있었으면 무서웠을 거예요"라고 공감해주고, "집도 없고 배고프고 매일 힘겹게 사는 게 싫다"는 이에게는 "돌아보면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 많다.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안내해 주겠다"고 대안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공감하기→신뢰 쌓기→대안 제시' 방향으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광자 이화여대 간호학 교수는 "자살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와 어려운 경제 상황 등에 치이면서 분노와 적개심이 쌓인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표출하는 최악의 의사소통 방법"이라고 분석했다. 사회구조적 환경과 자살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인적 자본과 관련된 보고서에서 "1인 가구 증가 등 급속한 가족 해체와 구조조정, 고용불안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등이 우울증 환자와 자살자 증가의 주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외환위기(1997년 13.1명→1998년 18.4명)와 글로벌 금융위기(2007년 23.7명→2009년 31.0명)를 거치면서 급격히 늘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자살률이 해마다 높아지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정부가 지역사회, 병원 등과 함께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 생사기로에 선 절박한 사연들… "전화 끊겠다" 말할 땐 가슴 철렁

전화 한 통의 기적을 행하는 상담원들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안쓰러운 죽음을 더 많이 막을 수 있다"

전화 한 통의 기적은 실패에서 비롯됐다. 1960년대 초 어느 날 자정 즈음에 호주의 알렌 워커 목사는 한 고아 청년(당시 38)의 전화를 받는다. 청년은 빚더미가 안긴 절망과 암담한 앞날을 털어놓았다. 워커 목사는 30분간 청년을 설득했다. 그러나 청년은 가스가 가득 찬 남루한 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유언을 남겼다. "제 얘기를 들어준 목사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이후 워커 목사는 청년의 죽음을 막지 못한 충격을 딛고, 전화 한 통에 매달렸다. 한 중년부인과의 통화를 통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화선 하나가 분주한 군중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그렇게 1963년 생명의전화가 탄생했고, 국내엔 1976년 정식 설립됐다. 자원봉사자만 5,000명이 넘는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등의 도움으로 자살을 막기 위해 다리 위에 설치한 SOS생명의전화는 현재 마포 한남 한강 원효대교에 각 4대씩 16대다.

박현규(45) 생명의전화 교육실장과 자원봉사 상담원 박용규(73) 신영자(74) 최희원(63)씨를 만났다. 다들 상담경력이 10년 이상인 베테랑이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기자는 사실 전화 한 통의 기적을 믿지 않았다. 마지막 결행의 순간에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는 건 애초 죽을 의도가 없었던 것이지 통화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그들도 살고 싶어합니다. 미련이 남아서, 호소를 하고 싶어서 수화기를 드는 겁니다. 죽기로 맘을 먹었으니 그 정도 용기라도 내는 거죠."(최희원)

그렇더라도 고작 전화 한 통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본능인 삶마저 포기하게 만든 절망과 좌절이 몇 마디 대화로 해결되거나 줄어들 수 있을까. "답은 스스로 찾아갑니다. 전화를 건 사람들 대부분이 '얘기를 들어달라'고 하는데, 결국 자신의 말 속에 해답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돼요. 우리는 그저 진심으로 들어주면 됩니다."(박용규)

1년간 교육을 받고 오랜 경험을 쌓았는데도 막상 다리 위에서 전화(자살 기도)가 걸려오면 머리 속이 하얗다. 그래서 경청과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의 첫 목소리가 떨리는지 차분한지, 말의 높낮이나 강약은 어떤지 살펴요. 상대의 처지가 돼보려고 노력하죠."(박 실장) "말의 리듬과 톤을 상대방과 맞춥니다."(박용규)

급박한 상황도 더러 발생한다. 집에 불을 지른 뒤 연락을 하거나, 수면제 30알을 먹고 흉기로 자해를 하면서 전화를 하거나, 다리 난간 너머에서 간신히 버티고 선 채로 통화를 하는 이들도 있다. 대화 중간에 "그만 끊겠다"고 연락이 두절되기라도 하면 수화기너머 상담원들은 난감하다. 바로 119에 신고해 다행스럽게도 생명을 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분명히 전화 한 통화의 한계는 명확하다. "생명의전화가 한번은 자살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순간 다리 위에서 내려오도록 유도하는 거죠. 그러나 다시 시도를 하게 된다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 전화를 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결국 자살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박 실장) 상담원들이 자살예방센터나 지원기관을 연결해주는 등 후속 조치까지 꼼꼼히 챙기는 것은 재발을 막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바람이 깃들어있다.

자살을 결심하는 이유도 점점 복잡 다양해지고 있다. 그만큼 살기 팍팍해졌다는 증거일 터. SNS 등 소통의 도구가 날로 번창하고 있지만 정작 맘을 터놓을 얘기 상대는 없다. "여가시간에 하는 놀이들도 점점 더 혼자 하는 게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는 꽉 막혀버린 소통의 숨통을 조금 틔우는 역할을 맡고 있는 거죠."(신영자)

잇따르고 있는 '묻지마 범죄'도 어쩌면 소통과 관심 부재가 낳은 비극일지 모른다. "'묻지마' 이전에 그들이 내뱉었을 '들어줘'라는 절규에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그들에게도 말벗이 있었다면 달라졌을 겁니다."(최희원) "언제라도 전화하세요. 24시간 대기하고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지만 가끔 기적이 일어납니다."(박 실장)

우리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 맘을 열고 귀 기울여보자, 가족의, 친구의, 직장동료의, 가난한 이웃의 낮은 목소리를.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129 또는 1577-0199 누르세요"… 서울시, 자살방지 동상 건립 계획도

생명의 전화 외에도 자살을 막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제도들이 있다. 전화상담으로는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보건복지콜센터 129번과 전국 보건소가 운영하는 정신보건센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번(전국 동일)이 있다. 두 전화 모두 365일 24시간 운영된다.

특히 129번은 지인에게서 자살 징후가 발견되거나 자살 시도자를 목격해 긴급한 대응이 필요할 때 전화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119 구조대를 바로 연결해 현장에 출동하도록 한다. 자살이 곧 벌어질 수 있는 응급상황을 적극 막아야 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번호다.

또 전국 8개 도에 있는 광역정신보건센터와 175개 시군구 정신보건센터는 1577-0199번을 통한 심층 전화상담뿐 아니라 대면 상담 및 심리 치료, 자조모임을 통한 치유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한국자살예방협회(http://www.counselling.or.kr)와 사랑의전화(http://www.counsel24.com) 등은 별도의 상담사이트를 운영, 익명으로 온라인 게시판이나 이메일을 이용해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울시는 9월 자살을 막는 동상을 설치하기로 했다. 자살 시도를 가장 많이 해 '자살 다리'라 불리는 서울 마포대교에 '한번만 더'라는 이름의 높이 1.1m 짜리 황동 동상을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실의에 빠진 친구의 볼을 꼬집으며 기운을 북돋워주는 두 친구의 모습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서울시는 동상과 함께 다리 난간에 사람이 지나가면 '혹시 지금 보고 싶은 사람 있어요? 생각만 하지 말고 보고 오는 건 어때요?'와 같은 팝업 메시지가 뜨도록 해 자살 시도자들의 마음을 돌린다는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당초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친구를 다른 친구가 잡는 동상을 설치키로 했지만 이 형상이 오히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어 다른 동상으로 바꿨다"며 "9월말까지 마포대교를 '생명의 다리'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우울증·자살따른 경제적 손실 한해 11조7200억원 추산

자살은 개인의 비극, 한 가정의 파탄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나라 전체로 봐도 인적, 경제적 손실이 엄청나다. 자살을 결코 몰락한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내놓은 '대한민국 인적 자본이 흔들리고 있다' 보고서에서 "우울증과 자살로 입는 경제적 손실이 한해 11조7,2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의료비 부담 증가, 생산성 하락, 인재 감소 등 점차 국가 경제 발전을 해치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살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 우울증으로 인한 작업손실 비용은 2010년 기준으로 6조5,000억원이다. 우울증 환자의 평균 작업 손실 일수 등을 감안한 수치인데, 10년 전(2조5,000억원)보다 2.6배나 커졌다. 이 기간 그만큼 우울증 환자수가 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2000년 22만명에서 2010년 53만명으로 껑충 뛰었고 진료비도 500억원에서 2,200억원으로 급증했다. 여기에 병원을 찾지 않은 잠재적 우울증 환자까지 감안하면 향후 개인의 의료비와 국민보험 재정 부담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3년 자살자 수가 집계된 이후 2010년까지 총 자살자수는 20만 명에 달한다. 보고서는 연령별 자살자수와 국민소득 통계를 바탕으로 이들이 생존했을 경우 2010년에 벌 수 있었던 금액을 5조원으로 추산했다. 이는 2010년 국내총생산(GDP)의 0.4%에 해당한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살자수의 10배로 추정되는 자살 기도자까지 합치면 우울증과 자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11조5,000억원을 뛰어넘을 것"이라며 "자살을 더 이상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고 국가 차원의 적극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우울증 환자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쉽게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하는 한편, 우울증도 신체 질환과 같이 일반적인 병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정책적 홍보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아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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