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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질감이 그대로, 상추가 살아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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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질감이 그대로, 상추가 살아있는 듯

입력
2017.05.2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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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씨

조혜란 글, 그림

사계절 발행ㆍ40쪽ㆍ1만1,500원

그림책의 모든 장면은 퀼트 입체 작품을 촬영해 천의 질감, 땀땀이 공들인 홈질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사계절 제공
그림책의 모든 장면은 퀼트 입체 작품을 촬영해 천의 질감, 땀땀이 공들인 홈질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사계절 제공

볕 좋고 바람 좋으니, 무엇이든 심고 가꾸기 좋은 때이다. 도시 주택가 곳곳에서도 한 뼘 빈 터 한 줌 흙에 물주고 김매며 가꾸는 손길을 만나곤 한다. 땅을 부동산으로 셈하는 이들이 세웠을 ‘경작 금지’ 팻말이 머쓱하도록, 아스팔트 콘크리트 세상 여기저기를 비집고 푸릇푸릇 자라는 생명이 꽃 못지않게 어여쁘다. 갓 딴 상추ㆍ풋고추ㆍ파ㆍ쑥갓이 푸짐한 싱싱 밥상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서로서로 볼이 미어지도록 쌈밥을 먹여주는 정경이 절로 떠오른다.

조혜란의 그림책 ‘상추씨’는 상추만큼이나 건강하고 생생한 어조로 그러나 작가 특유의 익살은 잊지 않은 채, 씨 뿌려 가꾸고 거두어 먹는 일의 기쁨에 대해 얘기한다. 한마디로 ‘경작 본능’을 불러일으킨다. 돌멩이로 울타리 친 딱 한 가족이 먹을 만큼의 손바닥 텃밭, 거기에 다가와 깨알 같은 상추씨를 뿌리는 작고 빨간 장화의 주인공은 최초의 농부 같다. 서툰 솜씨 탓에 몇 톨은 울타리 바깥으로 훌훌 날아가는 상추씨! 라이프니츠 대학 식물생태학 교수 한스외르크 퀴스터가 ‘곡물의 역사’에서 재배 식물 경작이야말로 문명과 국가를 만든 인류 최대의 사건이었다고 힘주어 말한 대목의 구현이랄까.

콩 심은 데 콩 나듯 상추씨 뿌린 자리에 상추 싹이 났다. 바람 맞고 비 맞고 햇빛 쬐며 어느새 울타리 넘치게 쑥쑥 자랐다. 빽빽이 자란 어린잎은 ‘군데군데 솎아 먹’고, 좀더 자란 큰 잎은 ‘뚝뚝 잘라’ 먹는다. 지금껏 웃고 놀라고 찡그리던 상추 잎들이 식탁에 오른 장면, 특히 고기며 회를 올려놓은 채 싱긋 웃는 입매를 하고 얌전히 눈 감은 상추잎을 보라. 사물에 눈 코 입 그려 넣은 그림을 편치 않게 여기는 독자조차 웃음 터트리게 만든다. 햇빛 쬐고 비 마시고 바람 맞으며 쑥쑥 자란 것으로, 싱싱하고 푸짐한 밥상을 차린 것으로 상추는 제 할 일을 마땅히 다 했다는 것이다.

‘상추씨’의 모든 장면은 퀼트 입체 작품으로, 촬영 작업 후 세심한 보정을 거쳐서 천의 질감과 그 위에 땀땀이 공들인 홈질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천을 오리고 잘라서 꿰매고 덧붙여 수놓은 솜씨는 풋풋하면서도 맵짜다. 그렇게 이뤄진 푸성귀의 이채로운 이미지는 낯설고도 새롭고 유쾌하다. 작가의 전작들이 보여준 능란한 붓 솜씨와는 다르게 그러나 똑같이 정성스럽고 곰살맞다. 그리고 뒤 표지 안쪽 면지에 붙어있는 조그만 봉투 하나!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그림책을 사야 봉투를 열어볼 수 있다.

누구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했다지만, 이즈음 특히 무엇인가 심어보고 싶고 가꿔보고 싶다. 우리 사회가 더도 덜도 없이 심은 대로 나는 땅이 되어줄까.

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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