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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갑과 을은 돌고 도는 것

입력
2016.09.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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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로 사람 관계를 구분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갑은 을을 핍박하고 을은 갑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갑을 관계는 상대적이라 어느 관계에선 갑이었던 사람이 다른 관계에서는 을이 되기도 한다. 내가 잠시 갑의 입장에 있다고 갑질을 해댈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그러지 못한다.

승우(가명)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1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1인 강사가 멋지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그 삶은 고단하다. 1인 강사는 교육을 필요로 하는 기업으로부터 직접 강의 요청을 받기도 하지만 교육에이전시 업체가 기업의 요구사항을 받아서 1인 강사들을 조직해 하나의 패키지로 제공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승우씨는 석 달 전 P라는 에이전트 업체로부터 요청을 받고 국내 굴지 대기업인 S사 직원을 상대로 ‘조직혁신과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5일에 걸쳐 하루 8시간씩 총 40시간 강의 및 워크숍을 진행했다. 에이전트 업체로부터 시간당 15만원, 합계 600만원을 받기로 구두 계약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이 정도 금액이면 좋은 조건이었다. 승우씨의 월 평균 수입은 200만 원정도. 그것도 불규칙적이었다. 결혼이 늦었고 애도 생기지 않아 승우씨 부부는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작년에 아내가 임신해 출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후조리를 도와 줄 가족이 없었기에 산후조리원에서 몸을 풀기로 했다. 비용은 2주에 250만원. 더 저렴한 산후조리원도 있었지만 승우씨는 아내가 출산하는 데 보다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었다. 궁핍한 사람의 계산은 치밀하고 정확하다. 그 정교한 톱니바퀴의 아귀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대책이 없어진다.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하루에 여덟 시간씩 닷새를 이어서 하면 정말 진이 빠집니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했습니다. 강의 후 평가도 5점 만점에 4.7점이라고 하더군요. 그럴 때 참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에이전트 P사가 강사료 지급을 미루는 상황이 발생했다. 강의를 마친 후 P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승우씨는 2주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P사에 강사료 지급을 요청했다. 담당자는 “정산 중이니 잠시 기다리세요”라고 답변했다. 승우씨는 P사 김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P사 김 대표 역시 기다리라는 차가운 반응. 1주일을 참았다가 전화하기를 3번. 승우씨는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려웠다. 승우씨는 인터넷을 통해 변호사를 검색한 후 사무실을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

변호사는 P사를 상대로 강사료 600만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것을 권했다. 문제는 변호사 보수. 그 변호사는 150만원을 변호사 보수로 제안했다. 승우씨로서는 600만원을 받기 위해 150만원을 지출하는 것이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하다 내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나를 다시 찾아왔다.

전형적인 갑질이다. 정식소송으로 가기에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 메시지를 김 대표 이메일, 문자, 카톡으로 보내보세요.” 승우씨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 제 전화나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한번 해보시죠. 어떻게 나오나.” 내가 준 메시지는 이렇다.

“김 대표님께.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아 이렇게 문자로 보냅니다. S사 강의료 관련해서 자꾸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표님이 S사로부터 돈을 받고서도 제게 주지 않을 리는 없을 테고, 결국 S사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S사의 갑질에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습니까. S사에는 윤리경영팀이 있고, 거기서는 S사 각 부서 갑질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S사 윤리경영팀에 민원을 제기하겠습니다. S사 교육팀이 얼마나 갑질이 심한지. 그래서 P사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 과연 이것이 대기업이 갖춰야 할 상생의 모습인지 따지겠습니다. 그 민원을 받고 나면 S사 교육팀은 혼쭐이 날 겁니다. 제가 대표님을 대신해서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동안 재촉해서 죄송합니다. 건강하세요.”

승우씨는 그 문안을 김대표의 메일, 문자, 카톡으로 다 발송했다. 메시지를 보낸 지 정확히 30분 만에 김 대표로부터 문자가 왔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 수주 때문에 바빠서요.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석 달 동안 전전긍긍하던 문제가 이렇게 풀리다니. 김 대표는 앞으로도 S사와 계속 거래를 해야 하는데, 승우씨로부터 저런 민원이 들어가면 S사와 거래는 물 건너갈 것이 뻔하다. 김 대표 입장에서는 승우씨는 무섭지 않지만 S사는 너무나 무서운 갑이다. 김 대표가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리겠다고 하니 김 대표도 움찔했던 것이다.

관계란 상대적이다. 어느 관계에서는 내가 우월한 입장이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순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약한 자에게 유독 가혹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언젠가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호되게 당할 가능성이 크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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