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낯선 곳서 하룻밤 묵게 된 레위인
자신의 안위 위해 불량배에 첩 내줘
#2
밤새도록 윤간당한 첩의 주검에
남편의 첫 마디는 “일어나 가자”
첩의 ‘목소리’ 배제한 서술 섬뜩
#3
피해자 고통에 대한 배려 없다면
‘미투 운동’ 성공할 수 없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이야기를 나는 성경을 통해 알았다. 그 섬뜩한 고통을 나도 조금이나마 느끼고 공감해 보아야 한다는 신앙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수많은 성서 독자들이 꼽는 가장 공포스러운 본문이며, 내용은 어느 성폭력 사건에 관한 것이다.
‘사사(士師)’ 시대라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앙을 떠나 엉망진창으로 살아가던 혼탁한 시기를 대표한다. 그래서 ‘사사기(士師記)’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막장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다. 약 기원전 11세기 즈음에 벌어졌던 일이다.
레위 족속의 어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첩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첩이 화가 나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서 데려오려고 처가로 쫓아갔다.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온 딸을, 친정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설득해 남편에게 돌려보내야 했겠지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딸은 넉 달이나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돌려보내기 싫었나 보다. 딸을 데리러 찾아온 사위가 미웠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쁘게 맞이하였다.”(사사기 19:3)
‘젊은 여자’는, 히브리 원어로 보자면 ‘결혼을 할’ 혹은 ‘갓 결혼한’ 연령대의 여자다.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열다섯 살 정도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딸을 쉽게 돌려보내기 어려웠나 보다. “장인 곧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붙들므로, 그는 사흘 동안 함께 지내며 먹고 마시면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19:4) 사흘이 지나 가려고 할 때에도 여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부디 오늘 하룻밤 더 여기서 묵으면서 기분 좋게 쉬게.”(19:6)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보내기가 그렇게나 아쉽고 불안했나 보다. 성경은 참 마음 아프게, 떠나는 딸을 붙잡는 아버지의 음성을 반복해서 들려준다.
나귀 두 마리에 안장을 지우고 남자와 첩은 마침내 자기 마을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집에 다다르기 전, 날이 어두워져 이들은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다행히도 너무나 마음 좋은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평온하게 쉬게 되었다. 공포영화가 늘 그렇듯, 이제 딱 무언가가 터질 순간이다. “그들이 한참 즐겁게 쉬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불량한 사내들이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싸고, 문을 두드리며, 집 주인인 노인에게 소리 질렀다.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19:22)
성폭력 위험에 여인을 내던지다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의 왕래가 잦지 않은 원시사회에서는 자기네 마을에 발을 들이게 된 외부인을 남녀 가리지 않고 몰려가 윤간을 하는 괴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쿵쾅거리며 문 두드리는 소리에 어린 여자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적들은 문 밖에 있었다. 곁에는 자기를 데리러 먼 길을 찾아 온 남편과 자애로운 집 주인 할아버지가 있었다. 노인은 이렇게 문 밖으로 소리 질렀다. “여보시오, 젊은이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19:23) 할아버지도 그 마을 사람이었지만 역시 자기네 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 놓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여자는 뭐라 형용조차하기 어려운 공포를 접한다. 노인이 곧이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노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어 그 남자들에게 주었다.”(19:24-25)
어린 여자에게는 온 우주는 순간 얼마나 생경스러웠을까? 돌연 그 집안의 공기는 얼마나 차가왔을까? 대체 현실감은 있었을까? 순간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어 온 몸의 피가 쑥 빠져버리는 것 같지 않았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차마 뭐라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냥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러자 그 남자들이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윤간하여 욕보인 뒤에, 새벽에 동이 틀 때에야 놓아 주었다. 동이 트자,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이 있는 그 노인의 집으로 돌아와, 문에 쓰러져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19:25-26)
성경의 이 성폭력 이야기는 가해자의 폭력에 대하여는 자세히 기술하지 않는다. 피해자에게는 보내기 싫어하던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 그 어린 여인이 낯선 곳에서 모든 남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낯선 밤을 지내야만 했다는 정황만을 또렷이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공포는 역설적으로 본문 자체다. 본문은 끌려 나간 여자가 겪은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위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어린 여자가 황망하게 끌려 나가 윤간을 당하는 상황을 저렇게나 짧고 무미건조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살려달라는 여인의 비명이나 그 고통의 몸부림을 처절하게 묘사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비명은커녕, 이야기 전체에서 여인은 ‘목소리’조차 없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피해자에 무관심한 성경기록
공포 영화도 종종 소위 ‘무관심’의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고전 ‘블루벨벳(Blue Velvet)’ 첫 장면을 보라. 정원에 물을 주고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장면 속 배경 음악으로는 너무나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가는 사람이 눈앞에 있지만, 영화의 음악은 그 사람의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쓰러진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듯이 격앙된 음악이 나온다면 오히려 공포감이 절감되었을 것이다. 무관심은 공포감을 증폭한다.
피해자가 억만년처럼 느꼈을 그 한 밤의 고통을 그저 담담히 서너 줄로 마쳐버렸다.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과, 이를 바라보는 사회와의 간극은 이와 같이 섬뜩한 것이다.
위 본문 마지막에 보면 여자는 밤새 윤간을 당하고도 남편과 노인이 있던 집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순진하게 그들을 믿어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보이고 싶어서일까? 그래도 남자들은 여인의 고통에 여전히 무관심했다. “그 여자의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집의 문을 열고 떠나려고 나와 보니, 자기 첩인 그 여자가 두 팔로 문지방을 잡고 문간에 쓰러져 있었다. 일어나서 같이 가자고 말하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 여자의 주검을 나귀에 싣고, 길을 떠나 자기 고장으로 갔다.”(19:26-28) 남편은 아침이 되기까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쓰러져 있던 여인에게 건넨 첫 마디는 “미안하다”가 아닌 “일어나 가자”였다.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정확한 패턴이다. 당연히 나서서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방관한다. 진정한 사과는 없다. 그저 잊고 “일어나 가자”고 한다.
성범죄가 일어나면, 많은 이들은 주로 ‘누구’에 관심을 많이 갖는다. 사실 ‘누구’보다는 ‘고통’에 더 큰 관심이 가야만 한다.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근간에 일어나는 ‘#미투(Me Too)’의 취지와 본질마저도 왜곡시킬 수 있다. 왜 꼭 이 사회는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인생을 거는 도박을 해야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일까? 참 고약한 회로가 아닐 수 없다.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밝히는 희생을 치러야만 문제가 해결 되는 것 같아 참 씁쓸하다. ‘누구’보다는 ‘고통’에 관심 갖는다면 각종 2차 피해와 고통도 막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없다면 ‘미투’ 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 집에 돌아 온 당신의 딸은 절대 두 번 다시 집 밖에 내어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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