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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급’ 뒤에 가려진 한국 인신매매 실태

입력
2017.07.3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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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0일은 유엔이 정한 ‘인신매매 근절의 날’ 이다. 공식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된 현대사회에서조차 국제적인 인신매매가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취지에서 지난 2013년부터 지정됐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인신매매 근절의 날’ 열린 바티칸 미사에서 “인신매매 범죄를 없애기 위해 각국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표면적으로 볼 때 인신매매 문제에 잘 대처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국무부가 지난달 28일 발간한 ‘2017년 인신매매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5년 연속 1등급으로 분류됐다. 인신매매 종식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 이행을 높게 평가 받았다. 조사 대상인 188개국 중 36개국만이 1등급에 포함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수준은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 한국이 인신매매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순 없다. 미 국무부의 보고서가 지적한 한국의 인신매매 실태를 자세히 살펴봤다.

미국 국무부가 지난달 발간한 ‘2017 인신매매 보고서’ 중 동아시아ㆍ남태평양 지역 인신매매 현황. 진한 초록색으로 칠해진 대한민국과 대만, 호주 등이 인신매매 근절 노력 1등급 국가다. 노란색인 일본 등은 2등급, 주황색인 태국과 파푸아뉴기니는 3등급 국가. 빨간색인 중국과 북한은 3등급 국가다. ‘인신매매 보고서’ 캡쳐.
미국 국무부가 지난달 발간한 ‘2017 인신매매 보고서’ 중 동아시아ㆍ남태평양 지역 인신매매 현황. 진한 초록색으로 칠해진 대한민국과 대만, 호주 등이 인신매매 근절 노력 1등급 국가다. 노란색인 일본 등은 2등급, 주황색인 태국과 파푸아뉴기니는 3등급 국가. 빨간색인 중국과 북한은 3등급 국가다. ‘인신매매 보고서’ 캡쳐.

한국인, 피해자이자 가해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 처한 성인 남녀와 아동의 ‘송출국ㆍ경유국ㆍ목적국’이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갔다가 인신매매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송출국),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한국을 거쳐 다른 나라로 이동하거나(경유국), 한국에서 피해를 당하는 사례(목적국)들도 지적됐다.

인신매매 피해를 당한 대부분의 한국인은 국내외에서 강제 성매매로 내몰리는 여성들이다. 보고서는 일부 한국여성들이 관광ㆍ취업ㆍ유학 비자로 다른 나라에 입국한 뒤 안마시술소, 주점, 식당이나 인터넷 성매매업체를 통해 강제로 성매매에 종사하게 된다고 소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여성이 인신매매 피해를 당하는 나라에는 기존에 알려진 미국ㆍ캐나다ㆍ일본ㆍ호주 및 홍콩ㆍ두바이ㆍ대만ㆍ마카오에 더해 칠레 등 남미 국가까지 포함됐다.

또 다른 한국인 피해자들은 지적 장애를 가진 남성들이다. 2014년 발생한 전남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처럼 지적장애인 남성을 데려다 폭행하고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은 채 노예처럼 노동을 시키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이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2014년 2월 서울 구로경찰서는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전남 신안군의 외딴섬에서 '염전노예'로 일한 지적장애인 김모씨와 채모씨를 탐문수사 끝에 구출했다. 김씨가 감시를 피해 '구출해달라'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수사의 단서가 됐다. 구멍 뚫린 양말을 신은 김씨가 염전 근처의 폐쇄된 건물에서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있다. 서울 구로경찰서 제공
2014년 2월 서울 구로경찰서는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전남 신안군의 외딴섬에서 '염전노예'로 일한 지적장애인 김모씨와 채모씨를 탐문수사 끝에 구출했다. 김씨가 감시를 피해 '구출해달라'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수사의 단서가 됐다. 구멍 뚫린 양말을 신은 김씨가 염전 근처의 폐쇄된 건물에서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있다. 서울 구로경찰서 제공

결혼하려다 강제노동에 얽히는 피해자들

2017년 보고서에선 지난해와 달리 한국인들의 인신매매 피해 부분 대신 인신매매 가해자로서 한국인들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가장 먼저 지적된 부분은 해외 여성들의 강제 성매매다. 미 국무부는 중국ㆍ필리핀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ㆍ기타 아시아 국가는 물론 중동과 남미 출신의 여성들이 한국 내에서 강제노동 및 성매매를 강요 받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연예인 비자’라 불리는 E6-2 비자를 통해 한국에 온 여성들이나 국제결혼중개업소를 통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한 동남아 여성들 중 일부가 성매매나 강제노동을 강요 받는 일이 계속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ㆍ캄보디아ㆍ몽골ㆍ필리핀 등지에서 벌이는 아동 성관광에 대해서도 2008년 이후 10년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필리핀ㆍ태국 등의 여성들은 ‘한국에서 가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공연 비자인 ‘E6-2’ 비자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지만 미군기지, 항구 인근 유흥주점에서의 성매매에 연루되곤 한다. 예술비자로 인한 성매매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호스트네이션’(감독 이고운)의 한 장면. 2017 제22회 서울인권영화제 홈페이지.
필리핀ㆍ태국 등의 여성들은 ‘한국에서 가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공연 비자인 ‘E6-2’ 비자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지만 미군기지, 항구 인근 유흥주점에서의 성매매에 연루되곤 한다. 예술비자로 인한 성매매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호스트네이션’(감독 이고운)의 한 장면. 2017 제22회 서울인권영화제 홈페이지.

성매매는 한국인이 벌이는 인신매매의 전부가 아니다. 미 국무부는 한국 어선에서 일하는 중국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 노동자들 역시 강제노동을 당하는 인신매매 피해자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자국이나 한국에서 수천달러의 채무에 연루된 뒤 그 대가로 ‘채무노예’가 된다는 게 보고서 분석이다. 이 밖에 태평양항구로 출항하기 좋은 한국을 거쳐 원양어선으로 보내진 뒤 강제노동을 하게 되는 경우도 문제점으로 지목됐다. 원양어선 중 정부나 선주협회 소관 밖에서 운항되는 소형 어선의 경우 외국인 착취에 취약하다는 게 미 국무부의 지적이다.

느슨한 사법 처리가 가장 아쉽다

미 국무부는 한국이 ‘진지하고 꾸준한 노력을 보여줬다’고 말한다. 한국은 지난해까지 7.397명의 잠재적 인신매매 피해자들에게 지원을 제공했고, 호텔ㆍ유흥비자 입국자들을 대상으로 인신매매 예방 절차를 강화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숫자로 보면 인신매매 관련 범죄에 대한 처벌도 늘었다. 2016년 정부는 인신매매 관련 신고사건 562건을 수사하고 연루자 426명을 기소했으며, 이들 중 213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015년에 수사한 사건이 421건, 기소자가 347명, 유죄확정 피의자가 64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발전된 수준이다.

하지만 보고서는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지난해 유죄가 확정된 사람들 중 형법 31장에 근거한 인신매매죄에 따라 처분을 받은 건 33명이며, 나머지는 보다 가벼운 혐의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동에 대한 인신매매를 근절하려면 지금보다 더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특별히 한국 남성들의 해외 아동 착취 범죄에 대해 한국 정부가 지난 10년 여간 기소를 하거나 유죄판결을 내리지 않았다고 명시한다. 지난 3월 필리핀에서 해외 아동 성매매를 벌이다 현지 경찰에 붙잡혔던 남성들도 두 달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무혐의로 풀려났다. (관련기사보기)

미 국무부는 한국이 “형법에 근거해 인신매매 사범을 수사ㆍ기소하고 유죄를 확정하려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정부의 인신매매 방지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국가행동계획을 수립하라”고 권고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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