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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청일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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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청일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14.07.2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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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갑오전쟁) 발발 120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의 갑오전쟁박물관 주변에 중국인 관람객들이 가득하다. 이곳은 당시 일본군에 궤멸된 중국 주력 북양함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청일전쟁(갑오전쟁) 발발 120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의 갑오전쟁박물관 주변에 중국인 관람객들이 가득하다. 이곳은 당시 일본군에 궤멸된 중국 주력 북양함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25일은 청일전쟁(중일갑오전쟁, 제1차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1894년 7월25일 우리나라 아산만의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나라의 함선을 침몰시키면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1995년4월17일 시모노세키(下關)조약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일본의 일방적 승리가 이어졌다. 전쟁 이후 일본은 사실상 한반도의 지배권을 열강들로부터 공인받고 대만까지 할양 받으면서 군국주의 침략의 길로 본격 들어섰다.

이로부터 두 갑자(甲子)가 지난 지금, 중국과 일본은 역사 인식과 영유권 분쟁 문제에서 다시 일전도 불사할 듯 충돌하고 있다. 그 사이에 놓인 우리의 처지도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아니 남북으로 분단되며 그때보다 오히려 더 복잡한 고차 방정식의 답을 구해야 하는 실정이다.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북양해군의 사령부가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현장을 찾아가 120년 전 전쟁의 그림자가 여전히 강하게 드리운 동아시아의 정세를 내다 봤다.

지난 23일 인천과 황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 산둥(山東)성 북동쪽 웨이하이(威海)시. 북양해군 사령부와 갑오전쟁박물관이 있는 류궁다오(劉公島)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여객 터미널은 전국에서 온 ‘애국(愛國)여행’ 인파들로 아침부터 북새통이었다. 휴가 차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체 학생들도 보였다. 전자 게시판엔 ‘갑오전쟁 120주년, 류궁다오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는 글귀가 흐르고 있었다. 여객 터미널 관계자는 “갑오전쟁 발발일이 가까워지면서 최근에는 평일 1만여명, 주말에는 1만5,0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120년전 굴욕의 역사 현장은 중국인의 애국주의를 고양하는 성지가 되고 있었다.

15분 정도 배를 타고 류궁다오 부두에 내리자 ‘순국열사들을 잊지 말고 해양 강국을 건설하자’는 문구가 새겨진 대형 화단이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았다. 9개월 간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숨진 청군은 3만1,500여명. 일본군 전사자 1만3,300여명보다 2배 이상 많다. 일본군이 전쟁 중 뤼순(旅順)에서 2만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 등을 감안하면 중국의 실질적 피해는 더 컸다. 뤼순에서 멀지 않은 진저우(金州)에 살던 취(曲)씨 가족 10명은 일본군이 쳐들어 오자 우물에 뛰어들어 함께 자살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만행은 참혹했다. 그럼에도 전쟁에 진 청나라는 일본에 무려 은 2억3,000만냥을 내야 했다. 당시 일본 연간 재정 수입의 8배나 되는 큰 액수였다. 중국이 굴욕을 잊지 말자고 외치는 이유다.

바다를 향해 망을 보고 있는 조각상 아래 세워진 갑오전쟁박물관의 전시실은 관람객이 몰려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당시 북양해군 군함들의 모형과 사진, 유품, 밀랍 인형으로 재현된 주요 전쟁 장면과 조약 체결 현장 등은 역사의 비극과 전쟁의 참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일반 관람객뿐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해군 제복을 입은 인민해방군도 단체로 관람을 와 눈길을 끌었다. 한 장교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왔다”고 밝혔다.

전시물은 일본이 전쟁 전부터 히로시마(廣島)에 지휘 본부인 대본영을 설치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는 점,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을 한 사실,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등 일본의 악행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또 당시 북양해군의 전함 규모가 총 4만여톤이었던 데 비해 일본은 7만여톤으로 객관적 전력이 청에게 열세였다는 점과 그럼에도 서태후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한 석조 유람선 건조에 해군의 군비가 전용된 사실 등도 꼬집었다. 전시실 끝 방은 120년 전의 굴욕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양력을 길러야 한다며 사실상 남중국해 전체를 중국의 영해로 표시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 곳의 ‘중국해양국토표시도’는 중국의 강역은 육지가 960㎢, 해역이 300㎢ 등 총 1,260㎢라고 주장했다. 과거의 굴욕을 미래의 해양 강국으로 승화시키겠다는 게 중국의 의도다.

전시실을 나와 5분 정도 내려 가니 북양해군 제독서(提督署ㆍ사령부)와 당시 제독이던 정여창(丁汝昌) 관사도 복원돼 있었다. 정여창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자료에는 “북양해군 군함들은 군사훈련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물자들을 나르느라 여러 항구들을 오갔다” “북양해군 병사들이 옷가지를 벗어 포신에 말리는 것을 보고 일본군은 청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됐다” “군기가 해이해져 밤에 군함을 이탈, 부두에 올라가 자는 이가 절반에 달했다” 등 당시 청군이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늠하게 하는 글귀도 보였다. 북양해군 제독서 뒷편엔 당시 일본군에 포획됐던 제원(濟遠)함의 함포와 어뢰 등 이후 바다에서 인양한 당시 무기들도 전시돼 있었다.

일본군은 풍도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뒤 성환전투, 평양전투, 압록강 하구의 황해해전에서 잇따라 대승을 올렸다. 이어 청나라로 무대를 옮겨 뤼순까지 점령했고 1895년 2월 북양해군 사령부인 류궁다오까지 진격했다. 이곳 앞바다에서 북양해군은 마지막 안간힘을 써 봤지만 5,000여명 이상 전사하며 전멸됐다. 제독 정여창은 1895년 2월12일 이 섬에 고립된 채 원병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자결했다. 후손들의 삶도 여전히 굴곡된 상태다. 북양해군 제독서 앞에선 정여창의 4대손인 딩샤오룽(丁小龍ㆍ63)씨가 한 향토사학자가 쓴 갑오해전이란 책에 ‘갑오전쟁120주년 기념’ 도장을 찍어 팔고 있었다. 하루에 30여권 정도 30위안(5,000원)짜리 책에 친필 서명을 해서 팔고 있는 패장(敗將)의 후손을 보는 일은 씁쓸하기 이를데 없었다.

부두로 돌아가는 길엔 인민해방군 모 해군 부대 군함 3척이 정박돼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황해에서 발해(渤海ㆍ보하이)로 들어가는 관문인 이 곳은 군사적인 요충지다. 그러나 공개된 장소에 군함을 정박시켜 놓은 것은 결사항전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류궁다오 전체가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었다. 다시 웨이하이로 돌아오기 위해 탄 배의 안내원 루산산(魯珊珊)씨는 관람객을 향해 “이번 류궁다오 여행이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청일전쟁 120주년의 의미와 교훈을 새겼기를 바란다”는 마무리 인사까지 했다.

류궁다오 현장 이외에도 청일전쟁 120주년을 맞아 중국에선 일본에게 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각오를 다지는 분위기가 달아 오르고 있다. 특히 당시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고 잘못된 점에 대해 반성하는 행보가 적잖다. 선봉에 선 건 관영 매체다.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참고소식(參考消息)과 인민해방군 기관지인 해방군보 등은 중국사학회와 함께 연초부터 갑오전쟁 기획 연재물을 싣고 있다. 장하이펑(張海鵬) 중국사학회장은 24일 중국 심천특구보와 인터뷰에서 “부패하고 무능했던 청나라가 성장하던 자본주의 국가 일본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외적들로부터 수백 차례 침략 당한 굴욕의 역사를 영원히 잊지 말고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일전쟁 당시 침몰당한 북양해군의 철갑 순양함 치원(致遠)함이 복원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용 3,700만위안(61억원)은 단둥시민들과 기업들이 마련했다. 지난 17일 갑오전쟁박물관 앞에선 중국과 대만 양안(兩岸) 서예가 120명이 한 자리에 모여 청일전쟁을 기념하는 길이 120m 초대형 서예 작품도 제작했다.

청일전쟁은 현 동북아 위기의 씨앗이 된 대사건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대만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점유했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최근 ‘청일ㆍ러일전쟁과 동아시아 영토문제’라는 논문에서 1880년대 이 섬에 표지를 세우고 일본 영토로 편입하자는 오키나와(沖繩)현청의 요구를 보류시킨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1894년 12월 돌연 센카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고 지적했다. 류장융(劉江永) 중국 칭화(淸華)대 교수도 ‘댜오위다오 전쟁의 역사적 맥락과 중일관계’라는 논문에서 이를 확인했다.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 문제가 중일 관계 악화의 핵이 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댜오위다오는 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처음으로 빼앗겼던 영토 주권이다. 더 이상 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과거의 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중국은 이 문제에서 결코 물러설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청일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아니 여전히 동북아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사건이다.

웨이하이=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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