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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매사냥ㆍ줄타기… 무형문화재 좇는 젊은이들

입력
2018.02.24 09: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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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영업자 안완균씨 TV로 접한 매사냥에 매료

3년 공들여 이수자 등록, 천연기념물 매 획득

매사냥 보전회 1000여명 등 저변 확대 추세

#2

줄타기로 세계여행 꿈꾸는 중학생

“줄타기 전승 내가 잇겠다” 자부심

‘전통 갓’ 짜는 IT 전문 직장인

“인고의 작업이지만 나의 숙명”

#3

대기업 그만두고 전통주 빚기도

유행 뒤처지고 전망 알 수 없지만

무형문화재 매력에 푹 빠져 살아

[저작권 한국일보]무형문화재 매사냥 이수자 안완균씨가 참매 ‘겨울이’를 하늘로 날리고 있다. 오대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무형문화재 매사냥 이수자 안완균씨가 참매 ‘겨울이’를 하늘로 날리고 있다. 오대근 기자

자영업자 안완균(44)씨의 취미는 ‘매사냥’이다. 시골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소, 염소, 개, 비둘기, 앵무새 등 동물을 많이 키웠다. 그러다 TV 다큐멘터리에서 매를 키워 다른 동물을 사냥하는 매사냥을 접한 뒤 매의 카리스마와 비행실력에 반해 매사냥을 배우게 됐다. 식생활을 위해 사냥하던 본래 목적은 아니지만, 야생성 강한 매를 길들여 함께 사냥을 다닐 수 있다는 점에 매료돼 대전에 사는 응사(鷹師ㆍ매를 부리는 사람)를 찾아갔고 수년간 교육도 받았다. 안씨처럼 무형문화재인 매사냥(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ㆍ대전시 무형문화재 제8호)을 골프나 낚시와 다름없는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안씨를 비롯해 매사냥 이수자 전원(19명)이 특별한 전수 의식이 아닌 “취미로써 접근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치열한 사명감으로 무형문화재를 잇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놀이, 혹은 생계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TV다큐멘터리 보다 매사냥 세계 빠져

매사냥은 야생성이 강한 매를 훈련해 다른 동물을 사냥하는 종목이다. 아시아에서 약 4,000년 전부터 식량 확보 수단으로 활용됐으나 현재는 무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안씨는 3년 간 매사냥 교육을 받고 이수심사와 시험을 거쳐 2016년 문화재청에 ‘매사냥 이수자’로 등록됐다. 이 과정을 거쳐야 천연기념물인 매를 포획할 권한이 생긴다. 안씨는 이렇게 2016년 겨울 참매 ‘겨울이’를 만났다.

이달 초 경기 안산시 월피동 공원에서 만난 안씨는 한 손에 생고기를 들고 겨울이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왼팔에 앉아있던 겨울이를 하늘로 날리고, 잠시 뒤 먹이를 주며 ‘겨울아’하고 부르면 다시 돌아와 사뿐히 앉는 일의 반복이다. “야생성이 강해 며칠만 훈련을 건너 뛰어도 말을 안 들어요. 손바닥에 올려 밥을 주며 길을 들이고 친해진 뒤 한 달 정도 훈련을 시키면 사냥에 나갈 수 있어요.”

안씨는 사무실에 횃대를 두고 겨울이를 키운다. 곁에는 조력견 ‘살구’도 함께 둔다. 매와 사냥개의 서열 정리도 중요하다고 한다. 매가 더 높은 서열에 있어야 개가 앞서 오리나 토끼 등 사냥감을 발견해 움직이도록 하고, 매가 이를 사냥하는 협업이 가능하다. 통상 조력견을 어릴 때부터 매와 함께 사육하는 이유다. 강아지는 매 부리에 여러 번 찍히면서 매를 자연스럽게 서열상 우위에 둔다.

매를 키우는 지침으로 ‘주야불이수, 좌가측필, 인중다처(밤낮 손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늘 옆에 앉혀 안정시키고, 사람이 많은 곳에 둬야 한다)’가 전해질 만큼 매를 훈련하는 데에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하다. 안씨는 겨울이에게 매일 한 번 밥을 주며 하늘로 날리는데 어쩌다 한참을 기다릴 때도 있다. 매는 자존심이 강해 사냥에 실패하면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오래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내려오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2~3시간을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아 난감할 때도 있지요.”

무형문화재 매사냥 이수자 안완균씨가 참매 ‘겨울이’와 조력견 ‘살구’를 훈련시키고 있다. 오대근 기자.
무형문화재 매사냥 이수자 안완균씨가 참매 ‘겨울이’와 조력견 ‘살구’를 훈련시키고 있다. 오대근 기자.

매사냥은 2010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맥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천연기념물인 매는 정부 허가없이 사육하는 게 불법이어서 매사냥 진입 문턱이 높아서였다. 하지만 이후 매사냥 전수교육 과정이 개설되고 매 포획권 부여가 이뤄지면서 현재 매 조련 이수자 19명, 매사냥 보전회 소속 회원 1,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저변이 확대됐다.

“줄타기하며 세계여행 하는 게 꿈”

[저작권 한국일보] 무형문화재 줄타기 전수교육생 한산하(14) 최준우(10) 최서우(14)군이 부채로 바람을 느끼며 줄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배우한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무형문화재 줄타기 전수교육생 한산하(14) 최준우(10) 최서우(14)군이 부채로 바람을 느끼며 줄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배우한 기자

“공중에 떠 있는 몇 초, 그 찰나에 느껴지는 짜릿함이 있어요. 줄타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죠.”

고등학교 풍물패 동아리에서 3년 전 우연히 줄타기 인간문화재 김대균(51) 선생의 공연 영상을 보고 줄에 입문한 줄타기(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 전수장학생 신재웅(22)ㆍ우정운(20)씨는 취미보다 훨씬 묵직한 직업으로 무형문화재를 선택한 케이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함께 줄타기를 전공하는 이들은 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느껴지지는 묘한 우월감, 그리고 공중에 뜬 쾌감 때문에 줄을 밟는다고 입을 모은다. 유행에 뒤처지고, 전망을 알 수 없는 문화재 전수자의 길을 선택한 또다른 젊은이들이다.

진분홍색 부채를 펼쳐 들고 줄 위에서 재담을 던지며 여유롭게 묘기를 선보이는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줄타기의 연습과정은 고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두 발로 2m 높이 줄 위에 섰다가 뛰어서 가랑이 사이로 줄을 넣어 반동으로 솟구쳐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쌍홍잽이’ 동작을 연습하다 보면 엉덩이가 까지고 말 못할 통증이 따른다. 살갗이 줄에 쓸려 까지지 않도록 보호대를 갖춰 입는다. 묘기를 부리다 줄에서 떨어져 본 경험이 한두 번씩은 있다. 그러나 줄을 타다 ‘줄과 분리되는 것’은 금칙이다.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지더라도 어떻게든 줄에 매달려야 한다. 금기 덕분에 크게 다친 적은 없다. 우씨는 “먼저 줄타기를 보존하고 다음엔 뮤지컬처럼 구성한 ‘연희극’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무형문화재 줄타기 전수교육생. 배우한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무형문화재 줄타기 전수교육생. 배우한 기자

이들보다 한참 어린 줄타기 전수교육생 한산하(14) 최서우(14) 최준우(10)군은 포부가 대단하다. 줄타기가 사라질까 걱정하는 대신 나름의 전승 계획도 갖고 있다. “줄타기가 사라지지 않게 내가 잇겠다”고 말할 정도다. 학급 친구들에게 프레젠테이션까지 해가며 줄타기를 설명한 한군은 “인간문화재가 돼서 줄타기 공연을 하며 세계여행을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무형문화재 정춘모 보유자와 가족들이 서울 삼성동 갓일공방에서 갓일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금화씨, 도국희씨, 정춘모선생, 정한수씨. 사진=박지연 기자
무형문화재 정춘모 보유자와 가족들이 서울 삼성동 갓일공방에서 갓일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금화씨, 도국희씨, 정춘모선생, 정한수씨. 사진=박지연 기자

인간문화재 길 선택한 IT 전문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갓일 공방의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갓일(국가무형문화재 제4호)에 빠져있는 이들 중 정한수(39)씨는 평일엔 전통적인 갓일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보기술(IT) 관련 기업에서 3D 그래픽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주말에는 갓일 인간문화재인 부친 정춘모(79)선생과 함께 종일 대나무와 인두를 붙들고 씨름한다. 지난해 갓일 전수교육 조교 시험에 합격한 그는 IT와 갓일을 두 손에 쥔 채 힘겨운 ‘전승자’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그저 갓일이 끊어질까 걱정하는 아버지를 생각해 조금씩 곁을 도왔다고 했다. 그러다 시나브로 업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배우자니 아버지 연세가 더 많아지시면 다 못 배울 것 같고, 당장 갓일에 전념하자니 가정을 꾸릴 게 막막해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한번 마음 먹으니 고민은 금세 끝나더군요.” 주중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엔 갓일에 전념하기를 수년째.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평일에도 공방으로 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갓일 보유자 정춘모 선생이 1980년 한국일보에 실린 갓일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박지연 기자
[한국일보 자료사진]갓일 보유자 정춘모 선생이 1980년 한국일보에 실린 갓일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박지연 기자

갓일은 인고의 작업이다. 하나를 만들려면 세 사람이 달라붙어 꼬박 여러 달을 협업해야 한다. 갓일은 주 재료인 대나무를 삶아 쪼개고 칼로 훑은 뒤 밀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가늘게 만든 대오리(가늘게 쪼갠 대나무)로 누군가는 그릇을 뒤집어놓은 듯한 갓 윗부분 ‘총모’를, 다른 이는 넓적한 챙인 ‘양태’를 만든다. 한수씨는 주로 이렇게 만들어진 총모와 양태를 잇는 ‘입자’ 작업을 한 뒤 명주를 입히고 옻칠로 마무리한다. 정춘모 선생과 아내 도국희(62)씨, 그리고 한수씨가 이 작업을 함께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갓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수개월이 족히 걸린다. 하루 종일 온 가족이 매달려 꼬박 한 달을 작업해야 양반갓 ‘포립’ 하나가 완성될 정도다. 왕이 쓰는 갓 ‘진사립’을 만드는 데에는 반년이 넘게 걸린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품이 많이 들고 시간을 쏟아야 하는 갓일은 낯설 수밖에 없다.

순수 ‘핸드메이드’인 갓의 가격은 500만~600만원. 진사립은 값을 매길 수 없지만 보험에 들 때 5,000만원으로 책정했다. 단가만 들으면 제법 괜찮은 업종 같아 보이지만 지난해 판매된 갓은 고작 6점. 한수씨 아내까지 네 식구가 총출동해 휴가도 가지 않고 1년을 쏟은 노동의 대가가 3,600여만원인 셈이다. 그나마 1점은 해마다 열리는 기능보유자 시연에서 문화재청이 구입한다. 나머지는 ‘통영갓’의 품질을 알아보고 명품으로 소장하려는 개인이 사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이다.

언제 팔릴지 모르는 갓을 왜 만들까. 돈도 안 되고 알아주는 이도 많지 않은데 문화유산을 전승하기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 하냐는 시선도 있다. 맥이 끊겼던 양태를 되살려 35년간 작업한 도씨는 “팔리든 안 팔리든 그저 지켜야 한다는 소신밖에 없다”며 “갓일은 하루만 안 해도 쇠퇴하기 때문에 매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변화에 따른 소멸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받아들이되 작업 과정을 동영상으로 남겨두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승이 그리 쉽게 될 리가 있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짐짓 목소리를 높인 답이 돌아왔다. “갓일은 시간이 가며 (몸에) 새겨지는 거예요. 며느리도 이제 ‘갓일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마음 먹는다고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지. 입자만 해도 공정이 60가지가 넘어요.”

정씨 가족은 갓일이 ‘숙명’이라고 말한다. “30대에 갓에 손대고는 갓만 만들고 살았다”는 정춘모 선생은 40여년 전 대구에서 만난 고(故) 김봉주 선생 제자로 갓일을 시작했다. 당시 갓일을 배워보겠다고 온 다른 제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두어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뒀다고 한다.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 갓일을 배우러 오는 이가 사라지면서 정 선생 가족이 자연스럽게 제자가 됐다.

온 집안이 30년 넘게 갓을 만들다 보니 삶에 대한 고민보다 문화재 걱정이 더 깊다. 도씨는 “문화재 전승하는 김에 돈벌이도 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텐데, 계승한다는 건 그 자체로도 힘든 일이에요. 벌이 생각할 시간에 명품 중에 명품인 조선시대 갓의 진짜 품질을 찾아가고 싶어요. 현대에는 갓을 안 쓰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기술도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안타까워요.” 종종 여행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사나’ 싶을 때도 있다고 한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할 일을 한다는 긍지가 있어서인지 갓을 만들다 보면 아프던 몸이 사르르 풀려요.”

젊은 나이에 문화재 전승자의 길을 선택한 한수씨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일찌감치 접었다. “자녀가 둘이나 있어 현실적인 부분을 무시하긴 어렵지만 문화재 집안이라 그런지 ‘돈 욕심 내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가풍 같은 게 있어요. 먹고 사는 일은 무형문화재가 아니더라도 죽을 때까지 고민하잖아요. 돈이 인생에서 아주 크지 않다고 거듭 생각합니다.” 공방을 놀이터 삼아 노는 아들 민현(7)군도 갓 만드는 일상이 익숙하다. “나중에 커서 뭐 될래” 하면 “경찰”이라고 답하지만, 할머니가 “너도 이 담에 커서 갓일 해야 해”라고 하면 잠자코 있다. 그러다가 불쑥 “할아버지는 갓 만들 때 제일 멋져”라고 답한다. 싫진 않은 모양이다.

손자에게 갓을 설명하는 무형문화재 정춘모 보유자. 박지연 기자
손자에게 갓을 설명하는 무형문화재 정춘모 보유자. 박지연 기자

양태, 총모, 입자 3가지 일이 어우러져야 하나의 갓이 완성되지만 현재 가족 중 정씨 부자만 ‘입자장’ 보유자와 전수조교로 인정받았다. 양태 없이는 갓을 만들 수 없으니 “나 아니면 갓의 명맥이 끊긴다”는 심정으로 도씨는 오늘도 양태를 만든다. 다른 양태장 보유자가 있지만 가족이 한데 모여 소통을 하며 유기적으로 작업하는 게 능률이 높다고 한다.

정씨 가족은 사극을 안 본다. 배우들이 쓰고 나오는 모조품 갓을 보면 기분이 상해서다. 실처럼 가늘게 밀어낸 대나무를 가닥가닥 공들여 붙여 수 개월간 만드는 장인들은 툭 치면 찌그러지는 모조품을 볼 때 짜증이 치민다. 한수씨는 “제작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조품을 쓰겠지만, 정말 보기 싫다”라며 “언젠가는 임금님이라도 제대로 된 갓을 쓰고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술 빚는 가업 위해 발효화학 전공

시대에 관계없이 대중에 널리 알려지고 수요도 많아 명맥 끊길 우려가 덜한 술 빚는 일은 주로 가업으로 수대 째 무형문화재 기능을 잇는다. 누룩방에서 태어난 문배주(국가무형문화재 제86-1호) 기능 보유자 이기춘(76) 선생은 학교에 입학하던 8살 때부터 술 빚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그도 대기업에 근무했다. 오로지 술만 빚어서 가족을 부양할 자신이 없어서다. 그러다 1990년 남북총리회담에서 북측 수석대표인 연형묵 당시 총리가 평양 술인 문배주를 맛본 뒤 “이 술이 제일 좋다”고 한 것이 세간에 알려지고 그 술을 빚은 이 선생이 함께 조명되면서 회사를 떠나 술 빚는 일에만 전념하게 됐다.

5대째 가업을 잇는 이기춘 선생 아들 문배주 이수자 승용(43)씨는 대학교 전공으로 발효화학을 택했다. 전문적인 문배주 전승자가 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문배주 일을 하셨고 제가 장손이다 보니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20년 넘게 했는데, 아홉살 난 아들이 나중에 대를 이어주길 바랍니다.”

문배주와 함께 경주 교동법주와 면천두견주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뿐 아니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술 종목도 대개 가업으로 이어진다. 일각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 종목을 특정 가문이 독차지하고 이수자를 양성하지 않는 것은 ‘가문 이기주의’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이 선생은 “어쩌다 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돈을 벌 목적이더라”며 “국가에서 지정한 인간문화재인데 아무에게나 기술을 가르쳐줬다가 문화유산이 훼손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우려했다. 이어 “우리 가문이 아니어도 명맥을 잇기 위해 찾아오는 이에겐 전승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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