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와 90년대 중반쯤까지 한국의 사회운동, 학술, 문화예술 등을 관통했던 키워드 중 하나가 민중이다.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억압 받는 존재인 민중은 새로운 관점과 상상력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탄생한 민중미술은 이전 세대의 추상 단색화 흐름을 극복하고 사회와 현실에 대해 발언했다. 그 그림들을 지금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회의 제목은 ‘리얼리즘의 복권’. 민정기 신학철 이종구 임옥상의 민중미술을 고영훈 권순철 오치균 황재형의 리얼리즘 작품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 미술 관람이 대중화한 요즘과 달리, 민중미술이 왕성했던 그때는 미술관에서 그림 볼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전시는, 비록 절정기는 지났으나 당시 못 본 민중미술을 여럿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전시작 중 상당수는 1980년대 그림이지만 또 상당수는 그 이후의 작품이다. 그 중 격동의 1987년을 담은 신학철의 ‘한국현대사 유월항쟁과 7, 8월 노동대투쟁도’나 문익환 목사가 휴전선을 뛰어넘고 있는 임옥상의 ‘하나됨을 위하여’처럼 기치가 선명한 작품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그러나 얼굴에 주름이 깊은 아버지를 그린 황재형의 ‘아버지의 자리’, 농부들이 지게를 메고 들판으로 나서는 모습을 담은 이종구의 ‘들-오지리 사람들’, 몸은 구부러졌으나 한 손에 태극기를 든 채 어디론가로 가고 있는 사내를 표현한 권순철의 ‘만세꾼 전씨’처럼 사람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노동 혹은 행위에 대한 위로 및 안타까움을 드러낸 그림도 차분하게 다가온다. 물론 기억의 귀납 혹은 회상에 머무는 작품이 많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담론을 기대하기엔 모자란다는 비판도 있다.
▦ 요즘은 민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임옥상이 지난해 민중총궐기의 풍경을 ‘상선약수’라는 작품으로 남겨 이번 전시에 내놓기는 했지만, 민중미술 또한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사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데다 한반도의 긴장이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현실이고 보면 미술이 이 시대를 포착해야 한다는 당위마저 외면할 것은 아니다. 규모도 크지 않고 성격도 약간 모호한 이번 전시가 사회를 향한 미술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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