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한다. 그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왜 측근 비리를 용인했는지 알겠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정치 의식이 그의 아버지가 대한민국을 통치하던 1960~70년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1979년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당연히 70년대 정치판이 어땠는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기록물이나 역사드라마 정도로만 알 뿐이다. 그러나 70년대 한국 사회 작동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12년전 필리핀 출장과 최근 워싱턴에서 지내며 알게 됐다.
2004년 재정경제부를 출입할 당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초청으로 필리핀 수도 마닐라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ADB가 마닐라에 본부를 두게 된 건 1966년 창설 당시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의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태생이지만 필리핀 여성과 결혼해 자녀까지 둔 50대 후반 ADB 직원이 한국 기자단을 안내했다. 그는 필리핀이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던 때를 애기하더니, 필리핀이 이렇게 된 건 코라손 아키노(재임 1986~92년) 전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재자 마르코스가 아니고 시민혁명 지도자 아키노를 지칭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논리는 이랬다. “마르코스는 부패했다.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외국에서 돈을 들여와 권력자들이 착복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도 20~30%는 돌아갔다. 그런데 아키노는 부패를 없앤다며 아무것도 안 했다. 국민이 배고파진 이유다.”
70년대는 한국도 그랬다. 당시에는 외화를 들여오는 게 특혜였다. 대내외 금리 차이만 연 10%포인트가 넘었다. 고급 생필품이 만성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수입권만 보장하면 돈 버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불균형 성장론’을 채택한 박정희 정권은 외자와 수입권을 특정 경제인들에게 몰아줬다. 마르코스 만큼은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도 부하들이 이권 배분에서 ‘떡고물’을 나눠먹는 걸 용인했다. ‘한국이 그렇게 일어섰다’는 게 당시 한국을 기억하는 미국인 원로들의 증언이다.
아버지와 측근들의 행태를 직접 본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측근의 이권개입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의혹이 제기되는 영적(靈的) 관계가 아니더라도, 어려울 때 충성한 대가로 그 정도는 해주는 걸 권력자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형적인 70년대 마인드다. 이곳 워싱턴 주변에도 3, 4공화국 권력자들의 후손들이 잘 살고 있다. 스스로는 경영 수완으로 미국에서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종자돈의 원천은 부정부패다.
지금이 70년대라면 최순실 문제 해법은 간단했을 것이다. 가산을 적몰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손쓰는 방법이다.
그러나 지금은 2016년이다. 해결방법이 달라야 한다.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해법을 알고 있다. 7월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저들이 낮게 나와도, 우리는 높게 간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70년대 식으로’ 낮게 나왔지만, 그래서 분통 터지지만 대한민국은 높게 가야 한다. 필리핀에게는 미안하지만 지난 50년 처지가 역전된 건 한국인들이 높게 갔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셈법은 70년대 방식이어서 힘들 수 있지만, 시민들은 할 수 있다. 정당한 분노는 표시하되 괴담은 골라내고 시스템을 깨서는 안 된다. 낮게 행동하면 우리가 약해지기를 원하는 집단만 좋아질 뿐이다. 당장 3일 외신 간담회에서 국무부 러셀 차관보에게 ‘최순실 사태가 사드 배치에 영향을 주겠느냐’고 질문한 건 중국 기자였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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