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아! 설날에는 꼭 쌀밥 먹게 해줄게.”지금도 가슴이 저며오는 어머니(원춘옥ㆍ元春玉)의 음성이다. 끼니조차 걱정해야 했던 강원도 주문진 시절.
“엄마! 나, 하얀 쌀밥에 간장 넣어서 싹싹 비벼 먹어봤으면 진짜 좋겠다”는 철부지 투정에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하셨던 것이다.
어머니인들 왜 쌀밥이 드시고 싶지 않았을까.
나중에 당뇨병으로 고생하실 때 진지상에 보리밥이 올라오면, 눈물까지 글썽이며 못내 서운해 하던 어머니가 아니었나.
어머니는 신명 많은 분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하춘화 쇼가 열렸을 때는 하춘화 손을 잡고 “우리 아들 출세 시켰으니 점심 대접하겠다”며 인근 막국수 집으로 데려갔고, 사진기자가 내 사진을 찍을 때면 나보다도 당신이 먼저 옷을 차려 입고 나타나셨다.
관광을 하다 지방 여관에 투숙할 때면 “나, 이주일이 어미인데 여관비 좀 깎읍시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시던 어머니였다.
내가 한창 유명해졌을 때는 조용필이다, 이덕화다 스타들과 함께 아들이 찍은 사진을 대형 액자에 담아 온 집을 도배하다시피 한 분도 어머니였다.
서울과 홍천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이주일이가 바로 내 아들”이라며 자랑을 하며 맨 앞 좌석에 앉으셨던 분이 바로 어머니였다.
지금도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처럼 흥이 많은 어머니께 가장 화려한 칠순잔치를 치러드린 일이다.
1986년 5월11일 서울 하얏트호텔 리젠시볼룸에서 강원도 홍천의 동네 주민 100여명을 모두 초청해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평소 몸빼 차림이던 어머니는 이날 처음으로 한복을 입고 “우리 아들 진짜 출세했다”며 덩실덩실 춤까지 추셨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철부지이고 불효자였다.
“이제 곧 주일이가 이 어미 보러 강원도 홍천으로 찾아오겠구나”라며 매년 설날만을 기다리시던 어머니, “나도 TV에 출연시켜달라”고 어린애마냥 투정을 부리셨던 어머니의 기대와 소원을 난 한번도 채워준 적이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조차 제대로 드린 적이 없다.
1987년 11월1일 어머니는 73세의 나이로 이 철부지와 불효자를 남겨두고 홀로 가셨다.
당시 한양대 부속병원 영안실에는 영안실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라는 1,000여명의 문상객이 찾아왔지만, 어머니의 빈 자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경춘묘원으로 가는 장례행렬은 대통령 행차를 방불케 했지만, 처음 TV에 출연한 후 어머니 뵈러 가는 그 때만은 못했다.
지금도 내게 어머니는 젊은 아낙네의 모습 그대로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새벽같이 포구에 나가 생선을 사다가 머리에 이고는 행상 길에 나섰다.
밤늦게 지쳐 돌아온 어머니는 그래도 항상 두 가지 선물을 들고 오셨다.
위장병을 얻어 드러누우신 아버지(정명수ㆍ鄭明壽ㆍ1970년 작고)를 위해서는 각종 약초를, 가난 속에 기가 죽어있던 아들에게는 세상의 희한한 풍물 이야기를.
그리고 흥이 나시면 벽장 속에 숨겨뒀던 가짜 안경이며 플라스틱 코ㆍ이빨 등을 꺼내 우스꽝스런 얼굴로 광대놀이까지 해보이셨다.
내가 ‘코미디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득한 그 시절, 소도구로 배고픈 아들을 웃겨주셨던 어머니 덕이라고 생각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