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 수준으로 망가진 외제 승용차가 주차장 구석에 버려져 있다. 베란다 앞 화단에 수북이 쌓인 쓰레기에선 악취가 풍긴다. 안마의자와 침대 매트리스, 냉장고와 세탁기가 단지 곳곳에 나뒹굴고 수풀처럼 우거진 현관 앞 잡초는 영화 속 폐가를 연상케 한다. 재건축 효과에 대한 기대로 부동산 시장에서 ‘대박 단지’로 주목받고 있는 서울 강동구 둔촌 주공과 강남구 개포 주공 아파트 4단지의 요즘 흔한 풍경이다. 각각 7월 20일과 8월 16일 이주가 시작된 두 단지 모두 이주민들이 버리고 간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사 때 폐기물 무단 투기로
남아 있는 수천 세대 고통
“악취에 벌레까지 나와”
무단 투기된 쓰레기와 폐기물로 인한 주민의 고통은 이주가 먼저 시작된 둔촌 주공이 더 심각하다. 27일 현재 이주율 33%로 전체 5,930세대 중 2,000세대 정도가 떠났지만 아직 4,000여세대가 살고 있다. 주민 최모(57)씨는 24일 “미관은 말할 것도 없고 악취에 벌레까지, 여름 보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당분간 지내고 있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주율 20% 정도인 개포 주공 4단지도 사정은 비슷하다.
주민들을 힘들게 하는 건 쓰레기와 악취뿐만이 아니다. 조경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고 유지보수를 제때 하지 않으니 건물 외벽은 금이 간 채 방치돼 있다. 창문 틀도 뒤틀어져 틈새가 벌어지는 등 주거 여건은 그야말로 최악 수준이다. 둔촌 주공 단지 내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이곳 주민의 70%가 세입자다 보니 아무래도 관리가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집주인들은 별 문제 없다는 반응이다. 세입자에게 전세를 내준 강모(52)씨는 “교육 교통 여건이 비슷한 주변에 비해 현저히 낮은 전세 가격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폐기비용 만만치 않은 탓
세입자 많은 지역 더 심각
한마디로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이 돼버린 강남 재건축 단지의 어지러운 풍경 뒤엔 돈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씁쓸한 현실이 숨어 있다. 쓰레기와 함께 양심까지 내팽개치고 떠난 자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자 모두 싼 임대료를 찾아 들어온 세입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양심도 양심이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만만치 않은 폐기물 배출 비용을 부담하기 보다 야금야금 내다 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둔촌 주공의 경우 실소유자가 많이 사는 고층 단지보다 세입자 비율이 높은 저층 단지의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경비원 정모(61)씨는 “주민들에게 당부도 하고 CCTV로 살펴보고도 있지만 작정하고 버리는 사람들을 당해낼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몰래 버린 사람 문제지만
관리소는 왜 방치하나…
빨리 떠나란 말로 들려”
취재 중 만난 주민들은 이런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관리소와 조합, 지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을 터뜨렸다. 세입자 이모(37)씨는 “이럴 거면 관리비는 왜 받나. 몰래 버리는 사람도 문제지만 방치하는 관리소도 문제다. ’빨리 떠나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세입자 최모(57)씨는 “절차에 따라 돈 내고 폐기물 스티커 붙여 내놓았는데도 수거해 가지 않더라"며 관할 지자체를 원망하기도 했다. 강동구청 관계자는 “쓰레기 무단 투기는 과태료 부과 대상이지만 이미 다 떠난 상황이라 단속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이주관리를 총괄하는 재건축 조합 이주센터 관계자는 “우리 직원이 세대를 직접 방문해 대형 폐기물을 일일이 확인 처리하고 있다”며 “외부에 방치된 폐기물과 쓰레기는 조만간 주민센터와 협조해 처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심재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재건축 인허가 단계에서 이주 기간 내 주거환경 유지 대책과 세입자의 원활한 이주를 지원하는 장치를 평가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거주자의 불편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둔촌 주공과 개포 주공 4단지 외에도 개포 주공1단지 등 많게는 2만여세대가 연내 또는 내년 초까지 이주를 마쳐야 한다. 당장 획기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눈부신 미래를 좇는 강남 재건축의 어두운 그늘은 더욱 짙어질 것으로 보인다.
취재 막바지에 만난 둔촌 주공 주민 이모(76)씨는 불편한 점을 묻자 “쓰레기보다 아직 이사 갈 곳도 구하지 못한 게 더 걱정이다. 겨울을 보낼 집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한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 둔촌 주공 아파트는
1980년 입주를 시작한 둔촌 주공 아파트는 저층 2개 단지 83개 동과 고층2개 단지 62개 동 등 총 5,930세대로 구성된 초대형 단지다. 대지면적이 62만6,232m2(약 19만평)로 넓은데다 저층이 많아 재건축 시 기대 수익이 크고 송파구와 인접해 있어 ‘강남권’으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투자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돼 왔다.
재건축 붐이 인 2000년부터 재건축 논의가 시작됐으나 단지 규모가 워낙 커 진행이 더뎠다. 그 과정에서 관리가 느슨해지고 주거 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집주인들은 보나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났다. “이곳 집 주인 중엔 본인 소유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한 부동산중개업자의 말처럼 ‘주인이 살지 않는 집’이 늘고 재건축이 현실화되면서 관리는 더욱 부실해졌다. 둔촌 주공의 이주 기간은 내년 1월 19일까지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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