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약자끼리 전쟁 치를 판
"여기 앉으세요" 양보 풍습 실종
고령화사회 불구 노약자석 부족
씁쓸한 자리다툼 벌어지기도
공존에 대한 인식 변화 필요
'만원鐵'에 휠체어 밀치고 먼저 타려고 달려드는 승객들
장애인은 번번이 차 놓쳐… 저상버스 이용도 힘겹기만
임신 5개월째인 김모(35)씨는 얼마 전 버스에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자리를 양보하라는 한 할머니 성화에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버스에서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애를 가졌다고 해도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르는 통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200만 회원이 가입돼 있는 임신ㆍ출산ㆍ육아 커뮤니티 ‘맘스홀릭베이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중교통 이용 고충을 호소하는 게시물이 올라온다. 최근 1주일 동안에만 배려와 관련한 불만 토로가 20여건이나 된다. 임산부배려석에 앉은 건장한 남성이 휴대전화만 쳐다봤다거나 임산부배려석이 생기고 나니 오히려 노인들이 “노약자석 말고 너희 자리에 앉아라”고 한다는 식의 하소연이다. 자리를 얻기 위해 산모수첩을 일부러 꺼내보거나 배가 더 나와 보이는 옷을 입는 등 노하우 공유까지 사연도 다양하다. 이 커뮤니티의 한 회원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감정이 참 오락가락한다”면서 “배려도 개념도 없는 사회에 짜증이 나면서도 그나마 한 번씩 양보해주시는 분들 덕에 또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0일 임산부의 날을 맞아 임산부와 일반인 8,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임산부 배려 인식 및 실천 설문 조사에서 만족도 수준은 10점 만점에서 4점 밖에 되지 않았다. 임산부의 40%는 배려를 받은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
배려에 대한 사회적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바닥이다.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의식이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설이 많이 갖춰지고 있지만 세심하지 못해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적잖은 사회적 비용을 쓰면서도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례는 주로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등 교통 약자와 관련해 많이 발생한다.
지난 21일 점심 무렵 지인과 함께 동대문에서 지하철 4호선 오이도행 열차에 오른 노모(63)씨는 탑승하자마자 빈자리를 찾아 바삐 칸칸이 옮겨 다녔다. 노씨는 “노인들의 외출시간대라 그런지 차량마다 노약자석이 노인들로 꽉 찼다”며 “노약자석이 아닌 일반석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세 칸을 이동하고도 자리를 찾지 못한 노씨 일행은 결국 자리가 날 때까지 노약자석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노씨는 “노약자 석이 없을 때는 너도나도 자리를 양보하려는 미풍양속이 있었다”며 “지금은 일반석에 서 있는 게 눈치 보이는 일”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 메트로는 1985년 10월 처음으로 노약자석 제도를, 2013년 12월에는 임산부 배려석을 도입했다.
천선영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독일, 영국, 스페인 등은 지하철 교통약자 배려석이 객차 공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며 “노약자와 비노약자가 마주 보거나 옆에 앉게 되는 식이 아니라 격차 양 끝에 따로 떼놓은 노약자 배려석 배치는 일종의 ‘연령 전쟁’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격리의 좌석 배치에서 초래된 갈등”이라는 분석이다. 서울메트로(1~4호선)와 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에 따르면 자리 양보에 대한 불만을 비롯한 교통약자석 관련 민원은 2013년 137건, 지난해 104건으로 매년 100건 이상 접수되고 있다.
배려 없는 사회에서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의 어려움은 더하다. 10대 때 사고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지체장애 1급 김소영(45)씨는 지하철을 이용할 때 마다 서로 먼저 타려는 인파에 밀려 승차 기회를 놓치는 일이 잦다. 그는 “비장애인이 먼저 지하철에 오르면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 확보가 어렵지만 장애인이 먼저 타도록 순서를 신경만 써 줘도 모든 승객이 다 탈 수 있다”며 “평소 휠체어에 길을 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요즘은 스마트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이들이 많아 괴로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교통 약자를 위해 도입한 저상버스만 해도 그렇다. 안팎으로 불편하다 보니 장애인의 이용이 많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지적이다. 바퀴가 수동 휠체어보다 굵고 큰 전동 휠체어는 저상버스에 설치된 벨트와 맞지 않아 고정할 수 없다. 저상버스 경사판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류장 가까이 붙어야 하는데 불법주정차 차량들 때문에 접근이 어려운 경우도 많고, 자주 사용하지 않다 보니 꼭 필요한 상황에 경사판이 제대로 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저상버스에 대한 접근도 문제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좀 떨어진 데 거주하는 1급 중증장애인 오모(45ㆍ뇌병변장애)씨의 경우 마을버스에 저상차량이 도입돼 있지 않아 외출할 때 대부분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한다. 노씨는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버스가 대부분인 국내 현실에서 휠체어를 타고 버스 타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며 “저상버스의 이용률이 낮고 관리가 잘 안 돼 막상 이용했을 때 고장으로 불편을 겪은 경험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저상 시내버스는 2003년 첫 도입 후 지난해말 기준으로 전체 시내버스 7,235대 중 35%(2,496대)가 저상버스로 교체됐을 정도로 늘었지만 마을버스, 고속버스 등에는 아직 보급되지 않고 있다.
김준환 충청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정책이나 관행은 소위 전문가나 정치인의 판단이 아니라 배려 당사자들의 필요와 요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한국사회가 도시화를 근간으로 성장해 타인을 대하는 방식도 정해진 규칙에 따르는 것 외에 자발성이 부족하게 됐다”며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방식의 사회적 약자 배려 정책에만 매달리기보다 공존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 변화의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분석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이 기사는 갈수록 팍팍한 한국 배려 문화를 다룬 기획 시리즈의 두 번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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