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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태극이라는 대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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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태극이라는 대못

입력
2017.03.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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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상징 태극 문양
정부 상징 태극 문양

박근혜 정권은 4년간 사회 이곳 저곳에 좋지 않은 자취를 남겼다. 그 중 ‘시각적으로’ 가장 도드라지는 흔적 중 하나는 바로 모든 정부기관에 도배된 태극문양 정부 상징이다.

태극은 국기(國旗)를 본뜬 것이고, 태극 자체의 철학적 의미도 심오하다. 그래서 상징의 자격이야 충분하다. 정부 대표문양이라거나 국회나 청와대 같이 나라를 대표하는 기관의 로고라면, 그걸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박 정권 때 도입되어 지금 쓰이는 정부 상징의 문제점은 바로 획일성이다. 기획재정부 청사를 가도 태극이고, 해양수산부 사무실 표지판에도 태극이 붙어 있다. 통일성을 그토록 강조하는 군대에서조차 부대별 마크가 따로 있는데, 제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갖춘 정부기관의 로고를 모두 획일화한 것은 지나치다.

과거 부처별 로고에는 각각의 상징과 포부, 전통이 담겨 있었다. 나라 곳간을 지키는 기재부의 상징은 열쇠를 품었고, 법치를 과제로 삼는 법무부의 상징에는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이 있었다. 국민 먹거리를 책임지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상징은 벼이삭이었다. 색이나 글꼴이 서로 달라 난삽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 부분은 공통의 꼴을 갖추게 하거나 글씨체를 맞춰 통일성을 살리면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획일화 조치가 국민도 잘 모르는 사이 정권 의지에 따라 결정된 정황도 여러 군데 나타난다. 정부는 정부상징체계 개발추진단이라는 민간 조직에서 1년간 변경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조직 활동이 언론 등에 노출된 사례가 거의 없어 대다수 국민은 정부 상징이 바뀌는 지도 몰랐다. 특히 이 상징체계 변화에 최순실 등 비선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뒤따랐다.

“정부상징을 통일하면 조직개편마다 로고를 바꾸며 예산을 낭비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는 정부 설명도 큰 설득력은 없다. 나라의 기관이 새로 생기고 조직이 바뀌는 일에는 그 나름 시대적 요청이 있기 때문일 것인데, 그렇다면 기관 특성을 한눈에 나타내는 상징과 이미지를 고민하는 작업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다. 부처가 생기고 바뀔 때마다 태극을 달아주는 것이야말로 성의 없는 일이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은 박 정권이 태극기를 대했던, 혹은 이용했던 태도다. 박 정권의 태극기 사랑은 유난했다. 국가 차원 태극기 달기 운동이 추진되다 여론에 밀려 무산된 적이 있고, 공무원 면접에 태극기 사괘(四卦)를 묻는 질문도 나왔다. 국내 최대 포털에 걸린 박 전 대통령 프로필 사진부터가 뒤에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이미지다. 박 정권은 항상 이런 식으로 애국심을 강요했고, 그 중심엔 언제나 태극기가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공교롭게도, 그 정권이 퇴출 위기에 몰리자 정권의 복고를 바라는 세력이 상징처럼 들고 나온 게 바로 태극기였다.

두 달 후면 다음 정권이 권력을 잡는다. 전 정권이 고의로, 실수로, 무지로 박았던 대못들을 하나하나 빼 갈 것이다. 그 중 하나의 작업은 태극으로 획일화된 정부 상징을 재고하는 일이었으면 한다. 태극을 상징으로 살릴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원과 독수리 문양을 유지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사례처럼 기본 형태에서 통일성을 갖추고 나머지 부분에서 기관별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정부(나라의 통치기구)와 정권(특정 정치권력)은 엄연히 다른 존재임에도, 정권은 항상 그 사실을 망각한다. 정부는 영속을 지향해야 하지만, 정권은 항시 유한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수명이 길어야 5년에 불과한 정권이 정부의 상징을 국민 공감대도 얻지 않고 독점해 버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정권의 구심력 탓에 억지로 묶였던 부처들의 개성을 이제는 태극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자. 국립중앙도서관, 중앙박물관, 국립병원 같은 곳까지 태극 아래 묶어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미국 연방정부 부처의 상징. 원형의 기본형태에 독수리를 활용하는 기본적 요건만 갖추고, 나머지는 부처나 기관별 특성을 반영하는 '혼합형' 정부 상징이다.
미국 연방정부 부처의 상징. 원형의 기본형태에 독수리를 활용하는 기본적 요건만 갖추고, 나머지는 부처나 기관별 특성을 반영하는 '혼합형' 정부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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